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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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새정치민주연합은 기초선거 정당 무공천 공약을 철회했다. 이 과정은 몇가지 점에서 우리의 정치문화, 특히 민주진보진영의 정치문화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는 듯하다. 이와 관련해 우선 들고 싶은 예는, 새정치연합이 무공천을 고수하려 했던 시기에 몇몇 정치평론가와 정치학자가 정당정치의 발전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정당 무공천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한 일이다. 이런 주장을 듣는 동안 그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감수성이 약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기초선거 후보자에 대한 정당 공천과 무공천은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당파적 이익을 넘어서 어느 편이 정치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지는 꼼꼼히 따져봐야겠지만, 그렇게 해본다 해도 정확하게 분별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에 비해 지난 대선에서 주요 후보자들이 모두 무공천을 약속했다는 사실은 분별의 노력조차 불필요할 정도로 명백히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약속은, 일단 이루어지고 나면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것 자체가 정치적 발전을 뜻하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것이 제대로 작동하느냐 하는 문제는 정치적 약속의 실현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약속의 능력이 퇴행하면 정치도 형해화된다.

버려진 약속과 난감한 약속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집요하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는가에 대해서 성찰해봐야 할 점이 있다. 더구나 기초선거 정당 무공천은 기초연금이나 국민행복기금처럼 예산제약을 가진 공약도 아니었다. 그런데 예산제약이 있는 공약도 지키려는 시늉은 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정당 무공천 공약은 해명 한마디 없이 내버린 것이다. 이런 행태를 파당적 이익에 집착하는 보수언론이나 정권에 납작 엎드린 공중파가 싸고도는 거야 어쩔 수 없을지 모른다(사실은 이런 행태에 대해서 비판하길 그쳐선 안된다). 하지만 진보적 매체들마저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지 뭐' 하며 그런 약속파기를 너무 쉽게 '양해'해주는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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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2014/04/16


정대화 / 상지대 교수, 정치학, 사학개혁국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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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봄, 대한민국 사학비리의 상징 김문기가 퇴출되면서 상지대학교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상지대는 온갖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대학 민주화와 발전을 이룩하여 민주화되고 투명한 대학운영을 자랑하는 중부권의 명문대학으로 우뚝 서며 사학민주화의 성공적인 모델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의해 일련의 과정을 거쳐 김문기 일족이 다시 상지대에 복귀하는 역사적 대반동의 드라마가 전개되었다.

이 드라마의 제1장은 김황식씨가 주심재판관인 대법원에서 상지대 정이사 체제를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권력과 한나라당의 요구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라 불리는 조정기구가 만들어졌다. 사분위는 대법원 판결을 더욱 왜곡하여 비리재단이 대학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분위의 정상화 심의 원칙이 그것이다. 이 원칙에 의해 김문기 비리재단이 상지대 이사회의 과반수를 점하게 되었다.

비리재단 복귀를 가능케 한 보이지 않는 힘

그로부터 3년 7개월 후인 2014년 3월 24일, 김문기 추천 정이사 한명이 추가되어 이사진의 3분의 2를 확보하자 이사장 등 나머지 3명의 이사가 전격 사퇴하였다. 이 상황에서 2014년 3월 31일 김문기의 아들 김길남이 이사장에 선출되면서 21년을 끌어온 김문기 비리재단의 상지대 복귀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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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2014/04/16


박승호 / 무기제로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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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월, 국제인권단체인 '인권을 위한 의사회'(Physicians for Human Rights, 이하 인권의사회)는 「한국에서의 최루가스 사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한다.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 온 나라를 들끊게 하던 때였다.

당시 인권의사회는 한국 당국이 시위대를 향해 엄청난 양의 최루가스를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고 지적하면서 '민간인에 대한 최루가스의 사용은 비인도적이며 의학적으로 용납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민간인에 대한 최루가스 사용을 금지하라고 권고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지 근 30년이 지난 지금, 이제 한국의 시위현장에서는 더이상 최루탄이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주요 최루탄 생산국으로 거론된다. 최루탄 생산업체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바레인을 뒤덮은 한국산 최루탄

2011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시민들이 개혁을 요구하며 거리를 점거하자 압제적인 정부들은 군과 경찰을 동원해 시민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시장이 활짝 열린 덕분이었을까? 아랍의 봄이 한참이던 2011~13년 한국은 310만발가량의 최루탄을 수출했다. 이 기간 한국산 최루탄을 제일 많이 구입한 최대 고객은 페르시아 만에 위치한 인구 130만의 작은 섬나라 바레인이다. 3년 동안 한국이 바레인으로 수출한 최루탄의 수는 150만발로 바레인의 인구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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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9 2014/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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