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자 혹은 4자'의 종전선언 추진, 중국이 섭섭할 일만은 아니다  

이남주 /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남북 정상의 공동선언 중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직접 관련된 3자 혹은 4자 정상들이 종전을 선언하도록 추진한다"는 문구에서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문제점 중 하나로 부각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참가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에 중국이 불만 혹은 서운함을 가질 수는 있다.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를 제안했다는 사실이 중국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과 중국이 지정학적 이익 등을 고려한 협력을 계속 유지하고는 있지만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서로에 대한 불만이 계속 증가해왔으며, 북한은 중국의 한반도문제 개입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자신을 배제하려고 한다는 의구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공동선언 문구에 대한 중국의 서운함

그러나 일부 언론에서 인용한 중국 관계자의 발언, 즉 "유감 이상의 것"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식의 발언은 중국정부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기에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보도를 근거로 중국정부의 태도를 판단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과 관련한 논의에서 중국의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인정한 측면도 있기 때문에, 냉정하게 판단하면 중국이 섭섭해할 일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북한은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중국의 참여를 인정한 적이 없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군사적 주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해왔고 남한의 경우 미국이 주한미군과 작전통수권 장악을 통해 군사적 주권을 행사해왔기 때문에, 북한은 평화협정의 주체가 북한과 미국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평화협정을 논의할 상대로 미국만을 인정하고 주한미군을 가장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시키는 이러한 입장은 점차 완화되어왔지만,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평화협정의 체결 방식과 관련해 다른 방법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다.

물론 중국으로서는 1990년대 후반에 한반도 긴장 완화와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4자회담과 최근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 등에 참여해왔다는 점을 근거로 자신도 한반도 평화체제 건설과 관련한 논의의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2000년 10월 '조미공동꼬뮈니께'에서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제로 바꾸어 조선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 방도가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였다"고 합의한 점도 중국의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즉 이러한 과거의 선례들은 중국이 한반도에서 영구적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논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데 일정한 합의가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평화체제 구축과 중국의 역할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에서 중국이 직접 당사자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북한은 1990년대 후반 4자회담에 참여했지만 이 회담에서도 평화협정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는 남북 사이의 평화협정 체결을 선호해왔다. 따라서 중국이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항구적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논의에 참여하는 것과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라는 공식적인 문서에 서명하는 것은 문제의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이번 정상회담에서 사용된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에는 한반도 종전선언 같은 중대한 합의에 중국이 참가할 수 있다는 데 남과 북이 합의했다는 사실이 담겨 있으므로, 중국이 이를 부정적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그리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는 어떤 단일한 협정에 의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종전선언, 불가침선언,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협정 등 다양한 구성요소에 의한 복합체제가 될 가능성이 높고, 각각의 경우에도 참가국의 범위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3자 혹은 4자"라는 약간 모호한 표현이 사용된 것은 불가피하기도 하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종전선언 문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었지만 종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구체적 논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고, 이 논의는 북핵문제의 해결과 북미관계 정상화의 속도와 결부되기 때문에,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같은 구체적인 방안이 당장 일정에 올랐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기대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포럼의 구성이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4자도 남북 양측이 합의한 것이며 중국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닝 푸쿠이(寧賦魁) 주한 중국대사의 지난 5일 발언은 공식적인 반응으로 비교적 적절해 보인다. 즉 중국정부로서는 이번 공동선언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하기보다는 자신이 당사자의 하나라는 점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중요한 것은 종전선언에 누가 참여하는가의 문제보다는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라는 2005년 9·19공동선언의 합의의 연장선 상에서 이루어질 한반도 평화체제와 관련한 포럼이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포럼이 현재 알려진 것처럼 4자의 형태로 진행된다면, "3자 혹은 4자"라는 표현이 초래한 시비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포럼에서는 우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가 어떤 제도와 조약으로 구성될지, 그 속에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해 더욱 구체적인 합의를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에 어떤 정해진 모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남북의 주도적 역할을 보장하면서 미국, 중국 등의 건설적 역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창의적 방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2007.10.9 ⓒ 이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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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 너머의 사회학을 위하여  

김종엽 | 한신대 교수, 사회학
 
송호근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수 문필가이다. 그의 신문칼럼은 그저 당면한 현실을 분석해서 전하는 여느 사회과학자들의 글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역사와 문학을 종횡하는 박람강기(博覽强記)도 눈부시고, 그것을 엮어내는 솜씨 또한 날렵한 검기(劍氣) 같은 문체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메씨지에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을 때조차도 그의 글은 늘 읽을 만하고 느낌도 상큼한 편이었다. 하지만 남북정상회담을 주제로 한 지난주 중앙일보 칼럼 <황태자를 위하여>를 읽은 뒤에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결이 매끈해 보이는 그의 칼럼이 실은 유릿가루 섞은 풀을 먹인 듯 섬뜩하게만 느껴졌고,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하는 반감을 누르기 어려웠다. 연전에 그가 황우석 교수를 비판하는 MBC <PD수첩>을 꾸짖다가 구설수에 휘말렸던 칼럼(중앙일보 2005.12.8)을 보았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당시 글을 처음 읽었을 때 고개가 갸우뚱했지만, 나중에 황우석 교수가 사기꾼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도 그의 칼럼에 큰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의 글은 같은 대학의 동료교수에 대한 정상적인 수준의 신의를 가진 사람이 그저 사태를 너무 빨리 단정하고 쓴 탓에 저지른 실수였을 뿐이다. 그래도 주요 일간지에 쓰는 칼럼인데 신중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할 수 있겠지만, 사람은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실수에 너무 엄격한 것은 그것대로 악덕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번 글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이 기차로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회담 자체도 연기되었으며, 그로 인해 정상회담의 정치적 의미도 일정한 변화를 겪을 테니 너무 서둘러 써서 생긴 실수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실수는 넘겨버린다 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남북정상회담의 파급력을 막아라! 

모두가 알다시피 현재의 남북정상회담은 분명 국내정치적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 어쨌거나 이번 대선행로가 그럭저럭 순탄하다고 생각할 야당과 보수언론으로서 그런 파급력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런 파급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들은 한편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정략적이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그런 정략 운운은, 그렇다면 남북정상회담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는 반문에 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얻어내기 어려운 데까지 기대수준을 높이려고 했다. 어떤 성과가 나오든 그것을 평가절하할 틀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다. 그만하면 이번 회담의 성과가 나쁘지 않다는 국민적 평가를 얻는다면 보수언론의 맹공이 그리 효과를 보기 어려우며, 더불어 이런 식으로 틀을 짜는 것이 어쨌거나 남북정상회담에 이목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야당이나 보수언론으로서는 이런 상황이 까다롭게 여겨질 법하다.

보수층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은유법

송호근 교수는 이런 상황을 다루는 한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보수층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를 늘려주고자 했다. 철도에 대한 낭만적 비유로 시작한 그의 칼럼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말하자면, 남북정상회담은 대선정국의 담론골격, 즉 프레이밍(framing)을 결정했다. 노대통령은 유권자의 관심을 '실책'으로부터 대북정책과 미래구도로 이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연결의 종착역, 황태자 책봉에 나설 것이다. 벌써부터 여권주자들이 자신의 공로를 애원하는 것을 보고 노대통령은 모처럼 느긋해할 것이다. 평양에서 타전될 수많은 뉴스, 정상간 합의, 후속사업 등과 관련된 화려한 논의의 후광을 한몸에 안을 황태자가 누구일까를 짐작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두 정상이 축배를 들 때 축사는 '통일을 위하여'겠지만, 나에게는 이렇게도 들린다. '황태자를 위하여'(<황태자를 위하여> 중앙일보 2007.8.14).
 
그는 '기차'와 '황태자 책봉' 사이를 '종착역'이라는 낱말로 잇는다. 세 단어의 연결은 의미심장하다. 칼럼 서두에서 기차는 "새로운 만남을 향해 떠나는 것"이라고 운을 뗐을 때 그는 기차를 둘러싼 수많은 은유 가운데 특정한 하나를 선택한 것인데, 이제 '목적'의 은유로도 쓰이는 종착역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동안 추진된 남북철도 연결사업의 의미를 처음부터 정상회담을 위한 '목적사업'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만일 노무현 대통령이 철도를 이용해 방북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송호근 교수는 이 스펙터클의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미리 침식하고 있는 셈이다.

'황태자 책봉'이라는 부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