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편집증의 사회적 기원   

3불정책은 폐지되어야 하는가

김진경 | 시인, 아동문학가

요즈음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것 중의 하나가 논술과외 광고이다. 그중에는 유치원 아동을 대상으로 한 광고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걸 볼 때마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의 삶일수록 놀이의 원리가 우세하게 작동하고 있고, 놀이와 현실, 놀이와 공부가 어우러져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어린이의 특성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지적 요구를 강요하면 오히려 흥미를 잃게 하고, 창조적 잠재력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아동책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게 그냥 한탄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아동책의 판매동향을 보면 대학입시 논술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여부가 판매량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다. 그래서 논술과 관련된 지식정보 기획물 쪽으로 시장이 이동하고 있고, 신문광고를 보면 창작물에도 흔히 대학논술에 이러저러하게 도움이 될 거라는 광고문구가 달려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작가로서 참 곤혹스럽다. 아이들의 특성과 현실, 다가올 미래를 고민해서 땀 흘려 쓴 작품들은 잘 안 나가는데 가볍게 쓴 작품들이 뜻밖에 잘 팔리는 경우가 많다.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 있어서 논술교육의 읽을거리로 적당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나마 동화 쪽은 논술 읽기자료로 어느정도 유용성이 인정되어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그림책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입시 참고서 시장만 있고 본격적인 청소년 독서시장은 없는 중고등학교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동 독서문화가 내용적으로 황폐화되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입시논술이 지배하는 아동 청소년 독서시장

아동출판 시장이 어른출판 시장과 다른 특성은 대개 구매자와 독자가 같지 않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건 어린이인데 책을 실질적으로 선택하고 사는 것은 부모 등 어른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책을 선택하게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책을 고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보통의 관심과 열의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출판 시장의 건강성은 어쩌면 구매자와 독자의 일치 정도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80년대 이후 성장해온 <창비> <사계절> <우리교육> <문학동네> 등 중견 전문출판사들의 건강한 아동출판은 독자와 구매자의 간격을 좁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아동출판의 성장은 따지고 보면 70, 80년대 우리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진취적 모습을 보였던 중산층이 기반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동출판 시장에서 독자와 구매자의 간격을 좁혔다는 것은 도구적 아동관, 즉 아동기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 수단,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며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회의 민주화 흐름이 모처럼 가능하게 했던 이러한 아동관과 아동출판의 변화 흐름이 꺾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아동문화의 손실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아동출판 시장의 변화 속도이다. 아무리 대학입시에 논술이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중고등학교도 아닌 아동출판 시장에서까지 어떻게 그렇게 빠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여기에는 아무래도 대학입시 제도의 변화보다 더 깊고 넓은 원인이 있는 듯싶다.

사교육 광풍을 부추기는 기득권의 이해관계

앞서 밝힌 대로 아동출판 시장의 지속적 확대는 경제성장에 따라 두터워지는 중산층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양극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중산층이 엷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불안감이 중산층을 부동산과 사교육 등 방어적 투자로 내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책수단으로도 부동산 투기와 사교육 열기가 잘 꺾이지 않는 것이다. 아동출판 시장의 변화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대학논술은 여기에 기름을 부어 그 속도를 빠르게 한 것뿐이다.

근래의 학교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 '권력실조증'에 빠진 기득권층이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불안감을 부채질하여 편집증(偏執症) 상태로 몰고가는 듯한 느낌이다. 평준화와 3不정책(기여입학제·고교등급제·본고사 금지)을 둘러싼 논란이 그렇다. 현재의 특수목적고·자립형사립고 학생수가 전체 고교생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과거 일류고가 전체 학생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1.5배나 넘어섰다. 그런데도 특정 언론과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특목고·자사고의 확대를 부르짖는다.

뿐만 아니라 강남 고등학생의 이른바 일류대 진학률이 전남의 9배에 이르고 다른 서울내 학군의 4~5배에 이른다. 특목고·자사고 학생수가 전체 학생수에서 차지하는 비율로 보나, 중산층 지역과 소외지역의 일류대 진학비율 차이로 보나 평준화는 사실상 무너졌다. 현재 정부가 평준화란 이름으로 가까스로 막고 있는 것은 고교입시의 부활이다. 고교입시가 부활되어 고등학교는 물론 전국의 중학교까지 서열화하고 입시지옥으로 만드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입시제도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굳이 평준화 해제, 즉 고교입시 부활을 통한 중고등학교 서열화를 요구하고 있다. 구태여 그러는 이유는 대입에서 고교등급제를 실현함으로써 내신 반영에서의 불이익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일부 집단의 그 작은 이익을 위해서 중학교와 초등학교를 다시 입시지옥으로 몰아넣어도 좋은 것일까?

3불정책 폐지와 '유전 일류대, 무전 삼류대' 현상

그렇지 않아도 최근 몇몇 대학들은 3불정책 폐지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보수언론을 비롯한 힘있는 집단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대 간다는 게 옛이야기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모 대학의 학생생활연구소가 제시하는 자료들을 분석해보면 금방 확인이 된다. 중산층 이상의 학생들 비율이 압도적이다.

그런데도 세계에도 유례가 드문 기여입학제를 허용하고, 특목고·자사고에 유리한 고교등급제를 허용하라고 요구한다. 또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한때 선례가 있었던 본고사를 허용하라고 한다. 논술만으로도 유치원까지 과외가 번지는데, 본고사마저 부활된다면 사교육 열풍을 부채질하고 사교육비 투자 정도가 대학 입학을 결정하는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 뻔하다. 3불정책 폐지, 평준화 해제는 결국 '유전 일류대, 무전 삼류대' 현상의 심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OECD 관계자는 우리나라 대학의 운영이 지나치게 불투명하기 때문에 현상황에서는 3불정책의 유지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OECD도 3불정책 폐지를 권고했다고 대대적으로 왜곡보도를 했다. 그리고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서울대발전위원회는 3불정책이 대학의 질을 낮추고 있다고 공식적인 불만을 토로했고, 이어서 사립대들이 3불정책 폐지 의견을 내놓았다.

'중산층의 불안심리를 부채질하라'

우리나라 고교 졸업생의 학력은 세계 3위로 최고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서울대는 1% 미만의 우수한 학생들만 뽑아간다. 그런데 서울대는 세계 100대 대학에 겨우겨우 턱걸이를 할까 말까 한 수준이다. 대학에 만연한 노예적 도제제도, 논문 베끼기를 놔두고 그런 소리를 한다는 건 지식인의 양식을 따지기 전에 파렴치하다. 왜 기득권층은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이런 주장을 하는 걸까? 누가 들으라고 하는 걸까?

그들은 중산층에 말하고 있다. "지금이 기회다! 밑에서 다시는 올라올 수 없게 계급의 벽을 쌓아라! 무엇보다도 부동산과 사교육이 최고야. 그걸로 쌓으면 절대 넘어올 수 없어!"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은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속삭여 중산층의 불안감을 편집증으로 몰고가려 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고도산업화로 인한 고용 없는 성장, 저출산 고령화, 코시안 외국인노동자 새터민 등 다문화사회로의 진입 같은 질적으로 새로운 문제에 부딪쳐 있다. 무엇보다도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지 않으면 사회경제적 양극화에서 비롯한 갈등이 폭발하여 그 사회적 비용 때문에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새로이 큰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각자의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면 선진사회의 문턱에 주저앉아 다 죽는 길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분열의 벽을 쌓도록 부추기고 그에 대한 편집증을 만연시키는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행위는 가히 반역사적 죄악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07.03.27 ⓒ 김진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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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본고사, 논술에 대한 사회적 책임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07년 대입 정시가 마무리되고 응시생들은 합격여부 통지를 받기 시작했다. 올해 입시에서는 어느 때보다 논술이 주목 대상이었다. 2008년이 되면 논술이 수능을 제치고 입시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해 전에 고지되었듯이 내년부터 수능은 등급체계가 9단계로 조정되어 실질적인 변별력을 잃게 된다. 수능 1등급에 속하는 학생수만 해도 이른바 SKY대학 입학정원의 배를 훌쩍 넘게 되니 수능이 입시에서 차지는 비중은 대폭 축소되고 그 빈자리를 논술이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이렇게 해서 수능, 그러니까 수학능력시험은 1994년 등장한 이래 2008년 입시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구실, 즉 입학시험이 아닌 자격시험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미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수능은 기능적으로 예전의 예비고사의 등가물이 된다. 수능이 1981년 학력고사의 등장과 더불어 폐지된 예비고사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예비고사의 짝으로서 함께 폐지되었던 본고사 또한 복원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는 당연히 논술이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8년, 본고사 체제가 부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본고사 부활의 원동력이 교육에서의 '구체제'(비평준화와 대학별 본고사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논술이 본고사로서 등극하는 배경은 이렇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전환한 뒤 끊임없는 난이도 조정, 등급 축소라는 정책이 뒤따랐다. 이런 정책경로를 이끈 에너지는 교육에서의 계급격차를 줄이고 사교육 부담을 덜어내려는 대중의 열망이었지만, 구체적 정책방향은 이런 대중의 열망에 중구난방 대응한, 정책적 정교함이라고는 전무했던 교육부로부터 나왔다. 대중의 의지와 정책적 무능의 결합이 낳은 엉뚱한 결과인데, 이런 점에서 '본고사 논술'의 출현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대학은 무거워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대학은 오랫동안 원했던 대학별 본고사를 힘 안 들이고 거저 얻었다. 뭐, 거저 얻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거저 얻었기 때문에 대학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자의식이 약하거나 혹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논술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지도 않고 있는데, 이건 큰 문제다. 왜냐하면 대학이 입시에서 자율권을 가졌다는 것은 곧 대학이 중등교육을 향도하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는 것은 권력행사의 여파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서울대가 논술강화 방안을 수립하면서 사회에 내놓은 것은 고작 '고전 200선' 목록이다. 그 목록을 훑어보면 대학교수랍시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 읽지 못한 책이 허다할뿐더러 지금 읽자고 작정하고 찬물로 얼굴 씻고 머리 동여매도 힘겹게 여겨지는 책들이 태반이다. 더구나 목록 말고는 어떤 독서의 길잡이도 제시된 적이 없는데, 이런 인문교양의 확산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리는 것이 그간 인문학 위기를 운운해온 교수들의 처신일 수 있을까.

논술 출제에 당면해서 조금 더 고민해서 내놓았다는 서울대 입시관리 관계자의 발언은 고작 논술학원을 다녀봐야 별 소용없도록 문제를 출제하겠다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올해 출제된 문제를 보면 논술교육을 대학 공부에 대한 선행학습 정도로 생각해온 논술학원 교육이 잘 감당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논술학원의 추격능력이 쉽게 무시될 수 없음은 그간의 경험이 잘 보여줄뿐더러 기껏 논술학원에 대해 대결의식을 보이는 것은 서울대가 정작 신경써야 할 요체를 놓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논술교육을 위한 인프라는 구축되어 있는가

본고사가 재래할 수 있던 것은 그것이 논술이라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논술은 적어도 입시경쟁이 무의미하거나 낭비적인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능력의 함양이 될 수 있는 제도로 인식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떤 사회집단도 논술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논술은 사회적 합의를 얻은 본고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합의는 전체 사회성원이 교육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지 않은 덕분에 얻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논술의 중요성이 증대하는 만큼 논술교육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인프라 구축은 단지 중등교사들에게 논술연수를 시행하는 수준 이상의 교육개혁을 요구한다. 중등교과과정 전반을 손봐야 하고, 그에 따라 교사양성체제를 개혁해야 하며 교과서를 정비하는 등 업그레이드된 소프트웨어를 공교육 속에 결합해나가야 한다. 여기에 이르면 사범대 개혁 같은 구조개혁 문제가 등장한다. 서울대라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커다란 권력이 곧 자신의 구조개혁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럴 때에야 중등교육을 향도할 권력에 더해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개혁의 추진을 주저하지 말아야

입시제도만 만지작거려온 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는 공소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입시제도 중에 유별나게 합리적인 제도는 없다. 대학입학 허가라는 희소한 자원의 획득을 어떤 식으로든 점수와 연계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합리적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력고사가 수능보다 열등한 것도, 수능이 논술보다 내재적으로 비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정당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잘 작동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져 있느냐이다.

수능의 몰락은 수능의 내재적 특성이 아니라 이런 체제의 불비 때문이었다고 봐야 하며, 논술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위태롭기까지 한 면도 있다. 왜냐하면 학력고사에서 수능을 거쳐 논술에 이르는 과정은 대학입시가 공식적인 중등교과과정과 거리를 점점 더 벌려온 과정이었고, 그 거리는 논술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우리 교육이 도달한 자리가 논술이다. 그렇다면 이 제도를 잘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논술과 더불어 교육제도의 고삐를 쥐게 된 명문대의 책임이 더 커졌다.

2007.01.30 ⓒ 김종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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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사교육, 그리고 정치적 진보  

성은애 | 단국대 영문과 교수

내신-논술과 더불어 '죽음의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대학입시의 주요 관문인 수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근본적으로는 도대체 4년간 수업을 들었을 뿐인 대학의 이름이 과연 한사람의 일생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쳐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겠지만, 수험생들이나 학부모들에게는 일단 이 세 겹의 관문을 '통과'하는 문제가 절박하다.

자녀를 원하는 대학에 입학시켜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대한민국 수험생 엄마들을 동원하면, 북핵문제쯤은 한달 안에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농담은 대학입시가 학생과 부모들에게 얼마나 치열하고 절박한 과업인지 잘 보여준다. 이 관문 앞에서는 정치적 입장이나 철학의 차이가 아무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에 대해 개탄하고, 공정한 경쟁과 기회균등의 정의를 주장하며,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없는 사회를 갈망하면서도, 자녀의 교육문제로 들어가면 그 모든 멋진 원칙들이 일거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는 그리 보기 드문 것이 아니다.

매년 수능 출제위원장이 인터뷰에 나와 '고교 3년의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학생이면 누구나……'라고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학부모와 학생들의 공황상태를 이용해 자꾸 커져가는 사교육시장은 이제 공교육의 규모와 수준을 훌쩍 넘어선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팽창세를 보이는 것은 단연 논술이다.

현재 고교교육의 틀에서는 제대로 소화할 수 없으면서도, 대입에서는 가장 결정적인 변별력이 나타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신이나 수능처럼 학습효과가 수치나 등급으로 바로 표시될 수 없으니 속터질 노릇이다. 학원으로서야 수요자의 불안감, 높은 교육비, 제로에 가까운 책임이라는 삼박자를 두루 갖춘 분야이니, 이렇게 좋은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공교육에서 가르칠 준비가 안되어 있는 분야를 입시에 포함하는 것은 부당하며, 따라서 공교육의 틀에서 글쓰기교육에 필요한 교사와 씨스템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학교간 편차를 고려할 수 없는 내신성적과 변별력이 떨어지는 수능 외에 다른 선발기준이 필요하다는 대학의 요구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고래들의 힘겨루기에 등이 터지는 새우 신세인 학부모들의 화제는 어쩔 수 없이, 어떻게 아이의 사고력과 글쓰기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을지에 집중된다.

최근 주변 어른들의 대화는 이러하다. 어떤 학원이 논술을 잘 가르쳐요? 글쎄요. 글쓰기가 학원에 다닌다고 좋아지나. 그렇다고 그냥 놔두면 저절로 글쓰기가 되냐고요. 그래도 논술학원에 오래 다니면 글이 틀에 박히게 돼서 오히려 안 좋다던데. 그건 그럴 것 같아요. 글쓰기라는 게 생각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학원에 다니면서 들입다 외워서 쓰는 것만 배우면…… 안 좋겠지. 그럼 학원엘 보내, 말아? 일단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던데. 그럼 초등학교 때부터 독서학원에 보내야 하는 거예요? 집에서 엄마가 붙들고 책을 읽혀야지. 그걸 어떻게 엄마가 일일이 다 해. ○○학원이라는 데가 있는데요. 거기가 책 읽고 토론수업하고 글 쓰고 하는 걸 잘 시킨다던데. 어떻게 시키는데요? 글쎄, 하여간 그 학원 원장이 왕년 □□대학 △△써클 출신이래요. 응, 운동권? 아, 대학에서인들 토론수업, 글쓰기수업 제대로 했나? 그나마 책 읽고 논쟁하고 글 쓰는 훈련 제대로 한 건 그 시절엔 운동권써클뿐이었잖우. 그거 말 되네. 만날 토론하고 대자보 쓰고 팸플릿 쓰는 게 일이었잖아. 그러니까, 논술선생으로는 딱이라니깐. 그래도 정치적으루다가 편향이…… 아니, 프로그램이 꽤 괜찮더라고. 학교에서 하기 힘든 철학·역사공부도 이것저것 많이 시키고, 방학 때는 유적 답사도 간대요. 그거 괜찮겠네, 우리도 어렸을 때 그렇게 배웠으면 훨씬 더 유식해졌을 텐데. 그래도 애들은 지겨워해. 어쨌든 시험이잖아. 학원비는 또 어쩌고. 어제 TV에 논술학원 강의장면이 잠깐 나왔는데, 강사가 그러던데. 논술문제 푸는 방향도 보수 신문보다는, 약간 진보적인 신문의 논조를 따라가는 게 유리하대. 북핵문제다 하면, ‘한미동맹 공고히하고 북한에 대한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 하는 것보단, ‘평화의 원칙을 지키며 대화로 풀어야 한다’ 이렇게 나가는 게 좀더 세련되어 보인다나. 믿거나, 말거나. 참, 웃기네, 사교육시장에서 그런 식으로 진보를 가르치며 돈벌이를…… 하하. 전교조는 요새 뭐 하나? 교원평가 받네 마네 그런 거 하지 말고, 이놈의 입시제도가 제대로 되어먹은 건지 그 얘기나 좀 계속 해보지. 하여간 이놈의 논술이 사람을 잡아요, 잡아. 학교에선 못 가르치고 안 가르치는 걸 어쨌든 해야 하니깐, 답이 없다니깐요, 에혀.

대개의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니, 이야기를 해도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는다. 교육기회의 평등, 개인의 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 일사불란한 서열화의 해체, 획일적이지 않은 평가기준, 공교육의 강화, 다양한 진로의 가능성, 이런 진보의 원칙들은 당장 자기 자식의 눈앞에 닥친 내신-수능-논술의 뻑뻑한 올가미 앞에서 꼬리를 내린다.

부모의 돈과 에너지와 문화자본이 많이 투여될수록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세태 탓에 부모들은 자신의 무능에 자괴감을 느끼고, 학생들은 뭐든지 다 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감을 느낀다. 살벌한 경쟁사회로 자식들을 내몰아야 하는 약하디약한 부모들 앞에, 더 많은 돈을 들여야 더 좋은 상품을 살 수 있다는 단호한 시장의 논리는 더욱더 기세등등하게 다가선다. 그리고 사고력과 논리력, 창의력에 대한 평가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둘러쓴 논술시험이 바로 그 최전방에 버티고 있다.

글쓰기 교육, 사고력과 창의력, 지적인 잠재능력, 모두 좋은 얘기다. 그러나 그것이 공교육이 아니라 주로 부모의 경제력과 문화자본에 의해 배양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진보의 이념과 어긋나는 것이다. 비판적인 진보 논리의 세련됨으로 글쓰기 교육에서 유리한 지점을 점유하는 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교육을 시장논리에 맡겨놓을 수밖에 없게 하는 정책 자체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이 정치적 진보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통과하는 와중에 행여나 정말 제대로 사고력을 키운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이 시험의 타당성과 의의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타당하지 않으므로 동의할 수 없는 경쟁에 어쩔 수 없이 뛰어드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심하게 훼손한다는 것을, 입시제도의 입안자들은 다시 한번 생각하셔야 할 것이다.

2006.11.14 ⓒ 성은애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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