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엘리뜨의 퇴행성 본고사주의   

김종엽 | 한신대 교수

지난달 21일 서울대 장기발전위원회가 교육부의 3불정책을 대학경쟁력의 암초라고 주장하고 나서고부터 3불정책이 논란거리이다. 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이 세가지를 입시전형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교육부의 3불정책인데, 정책의 이름으로서는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다. 정부가 힘이 세다면 이런 정책 명칭은 사회집단의 행동을 규율하는 가드레일의 간명한 이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들 정책 내용 가운데 하나에만 반대해도 모두 그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에 정렬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연전의 '4대 개혁입법'이 개혁입법 가운데 하나에만 반대하는 집단도 모두 4개 개혁입법 저지세력으로 결집하게 만든 것과 비슷한 꼴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4대 개혁입법이라는 명칭은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혁에 반대한다는 부담을 지게 하지만, 3불정책이라는 명칭은 반대진영이 마치 국가의 부당한 금지와 성가신 개입에 반대하는 것으로도 비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3불정책 반대하는 서울대와 사립대의 따로 또 같이

세가지 입시전형 방법을 묶어서 금지함으로써 생긴 이런 부작용은 이번 논란에서 실제로 나타난 듯싶다. 이번 논란은 서울대가 '총대'를 메고 시작한 셈인데, 그런 서울대가 정작 기여입학제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서울대를 바로 거들고 나선 사립대 총장협의회 회장단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추정컨대 기여입학제일 것이다. 그런데 둘이 사이좋게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아무튼 논란이 커진 이유는 3불정책의 고수와 폐지 주장의 바닥에 놓인 것이 교육을 둘러싼 계급갈등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계급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갈등, 그러니까 제도 변화가 불러올 이해관계의 변화에 대한 각 집단의 계산에서 촉발된 대립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엔 적어도 역사적 경험이나 집단의 습속 같은 것이 개입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3불정책을 공격하는 집단들, 이번 경우 서울대의 발언에는 명백히 계산된 이익 추구와는 다른 어떤 소신 내지 확신이 어른거리게 되는 것 같다. 왜 그런 것이고, 그 소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따져보자.

금지된 세가지 가운데 기여입학제는 논의의 대상에 올릴 만한 것이 못된다. 윤색된 이름이어서 그렇지 대학입학 구매제에 지나지 않는 기여입학제는 세상 어디에서도 시행되지 않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본고사와 고교등급제인데, 이 가운데 고교등급제는 연좌제 성격이 있어서 도입되기도 어렵지만, 이미 낮은 실질 반영률로 무력화된 내신을 생각하면 굳이 도입을 생각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이 제도는 본고사가 허용되고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 아무 필요가 없다. 결국 3불정책이라고 하지만 핵심은 본고사이며, 이번 논란을 불러들인 서울대가 노리고 있는 것도 본고사라고 할 수 있다.

'本考査' 그 이름의 복권에 숨은 엘리뜨주의

그렇다면 왜 본고사가 문제인가? 왜 서울대는 그토록 본고사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본고사'라는 명칭에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사는 각 대학이 출제한 문제로 치르는 시험이 입시전형의 핵심 자료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그것의 정상적인 혹은 일반적인 명칭은 '대학별고사'이며, 요즘 '논술고사'라고 불리는 것 또한 대학별고사의 일종이다. 그런데 현재 3불정책 자체가 금지하는 대상이나, 그것에 저항하는 집단이 원하는 것도 언제나 '본고사'라고 지칭된다.

본고사라는 표현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그것의 짝이 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있었던 대학입학 '예비고사'이다. 순수하게 자격시험이었던 이 시험은 말 그대로 대학별고사를 치르기 전의 '예비'였고, 대학별고사가 진짜 시험인 '본'고사였다. 이 점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40대 중반 이상에게는 다시 듣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잘 알려진 일인데, 중요한 것은 그런 제도가 사라진 지 25년이 넘어도 여전히 그것이 지배적 명칭이라는 점이다.

사라진 제도의 명칭이 사반세기가 지나서도 우리의 표현을 점령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대학입학 시험이 영광의 절정감이든 패배의 뼈아픔이든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개인들에게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 제도 아래서 성장한 사람들이 지금 40대 중반 이상 50대와 60대, 그러니까 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진 연령 세대에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에게 본고사란 대학별 시험이 주요 전형자료가 되는 것 이상의 문제, 그러니까 70년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논술 '따위'는 전혀 본고사로 지각되지 않는 것이다.

70년대 서울대 출신의 노스탤지어, 이제는 성찰해야

하지만 이런 사실은 본고사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그 쓰임새에 어떤 은밀한 가정이 내포되는지는 말해주지만, 왜 70년대로의 회귀가 공공연히 주장되는가를 밝혀주지는 않는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울대가 내비치는 본고사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더해지는 다른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좁게는 서울대 교수, 넓게는 서울대 출신들이 가지는 공통의 특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청년기에 대학입학 시험에서 승자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험은 당연히 그들의 삶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경험이 그들의 이후 삶의 경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70년대 서울대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그 경험은 두 가지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하나는 그들의 연령대가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진 집단일 뿐 아니라 그들이 그 연령대 중에서도 엘리뜨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한국사회의 유례없는 경제성장 국면을 타고 사회에 진출한 세대이며, 대학생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기에 명문대를 나와서 승승장구했던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본고사는 좋았던 시절을 응축적으로 상징한다. 그들은 본고사에서 영광을 맛보았고, 그 본고사에서의 승리를 토대로 '달콤한 인생'을 얻었다. 그들 중 일부는 현재 서울대 교수가 되기도 했고 또 상당수는 자녀의 대학입시에 직면해 있는데, 7차교육과정으로 입시는 복잡해지기만 했고, 수능 9등급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변별력이 없다. 서울대 교수들은 우수하다고는 하나 한껏 쉬워진 교과과정을 이수한 학생을 수업에서 만나게 되고, 자녀가 입시생이 된 서울대 출신들에게 현재의 입시는 어지럽고 비효율적이고 복잡하고 불안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좋았던 시절에 집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동료 집단 속에서 그런 정서는 거의 저항 없이 통용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착은 상식으로 전환된다.

한 집단의 습속에 뿜어나오는 향수(鄕愁) 취미가 소신으로 발전하는 일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너무 힘있는 집단이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걸맞은 책임감과 성찰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도 변했고, 아이들도 변했고, 대학도 변했다. 그 각각이 속한 환경도 바뀌었다. 이렇게 문제도 조건도 새로워졌다. 그런데 당면한 문제에 새롭게 도전하기보다는 지금은 사라진 조건 위에 서 있었던 어떤 제도에 대한 낡은 집착만이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오른다는 사실이 몹시 씁쓸하다.

2007.04.03 ⓒ 김종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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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본고사, 논술에 대한 사회적 책임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2007년 대입 정시가 마무리되고 응시생들은 합격여부 통지를 받기 시작했다. 올해 입시에서는 어느 때보다 논술이 주목 대상이었다. 2008년이 되면 논술이 수능을 제치고 입시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해 전에 고지되었듯이 내년부터 수능은 등급체계가 9단계로 조정되어 실질적인 변별력을 잃게 된다. 수능 1등급에 속하는 학생수만 해도 이른바 SKY대학 입학정원의 배를 훌쩍 넘게 되니 수능이 입시에서 차지는 비중은 대폭 축소되고 그 빈자리를 논술이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되짚어보면 이렇게 해서 수능, 그러니까 수학능력시험은 1994년 등장한 이래 2008년 입시에서 처음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구실, 즉 입학시험이 아닌 자격시험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다. 미소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수능은 기능적으로 예전의 예비고사의 등가물이 된다. 수능이 1981년 학력고사의 등장과 더불어 폐지된 예비고사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예비고사의 짝으로서 함께 폐지되었던 본고사 또한 복원될 수밖에 없다. 그 자리는 당연히 논술이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08년, 본고사 체제가 부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본고사 부활의 원동력이 교육에서의 '구체제'(비평준화와 대학별 본고사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논술이 본고사로서 등극하는 배경은 이렇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전환한 뒤 끊임없는 난이도 조정, 등급 축소라는 정책이 뒤따랐다. 이런 정책경로를 이끈 에너지는 교육에서의 계급격차를 줄이고 사교육 부담을 덜어내려는 대중의 열망이었지만, 구체적 정책방향은 이런 대중의 열망에 중구난방 대응한, 정책적 정교함이라고는 전무했던 교육부로부터 나왔다. 대중의 의지와 정책적 무능의 결합이 낳은 엉뚱한 결과인데, 이런 점에서 '본고사 논술'의 출현은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대학은 무거워진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무튼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대학은 오랫동안 원했던 대학별 본고사를 힘 안 들이고 거저 얻었다. 뭐, 거저 얻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거저 얻었기 때문에 대학은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자의식이 약하거나 혹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논술과 관련해서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자세를 보이지도 않고 있는데, 이건 큰 문제다. 왜냐하면 대학이 입시에서 자율권을 가졌다는 것은 곧 대학이 중등교육을 향도하는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에 대한 자의식이 없다는 것은 권력행사의 여파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서울대가 논술강화 방안을 수립하면서 사회에 내놓은 것은 고작 '고전 200선' 목록이다. 그 목록을 훑어보면 대학교수랍시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 읽지 못한 책이 허다할뿐더러 지금 읽자고 작정하고 찬물로 얼굴 씻고 머리 동여매도 힘겹게 여겨지는 책들이 태반이다. 더구나 목록 말고는 어떤 독서의 길잡이도 제시된 적이 없는데, 이런 인문교양의 확산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버리는 것이 그간 인문학 위기를 운운해온 교수들의 처신일 수 있을까.

논술 출제에 당면해서 조금 더 고민해서 내놓았다는 서울대 입시관리 관계자의 발언은 고작 논술학원을 다녀봐야 별 소용없도록 문제를 출제하겠다는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올해 출제된 문제를 보면 논술교육을 대학 공부에 대한 선행학습 정도로 생각해온 논술학원 교육이 잘 감당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논술학원의 추격능력이 쉽게 무시될 수 없음은 그간의 경험이 잘 보여줄뿐더러 기껏 논술학원에 대해 대결의식을 보이는 것은 서울대가 정작 신경써야 할 요체를 놓치고 있음을 말해준다.

논술교육을 위한 인프라는 구축되어 있는가

본고사가 재래할 수 있던 것은 그것이 논술이라는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논술은 적어도 입시경쟁이 무의미하거나 낭비적인 것이 아니라 가치있는 능력의 함양이 될 수 있는 제도로 인식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떤 사회집단도 논술을 명시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논술은 사회적 합의를 얻은 본고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합의는 전체 사회성원이 교육에 대한 방향감각을 잃지 않은 덕분에 얻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논술의 중요성이 증대하는 만큼 논술교육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인프라 구축은 단지 중등교사들에게 논술연수를 시행하는 수준 이상의 교육개혁을 요구한다. 중등교과과정 전반을 손봐야 하고, 그에 따라 교사양성체제를 개혁해야 하며 교과서를 정비하는 등 업그레이드된 소프트웨어를 공교육 속에 결합해나가야 한다. 여기에 이르면 사범대 개혁 같은 구조개혁 문제가 등장한다. 서울대라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커다란 권력이 곧 자신의 구조개혁도 요구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그럴 때에야 중등교육을 향도할 권력에 더해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육개혁의 추진을 주저하지 말아야

입시제도만 만지작거려온 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는 공소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입시제도 중에 유별나게 합리적인 제도는 없다. 대학입학 허가라는 희소한 자원의 획득을 어떤 식으로든 점수와 연계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 합리적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학력고사가 수능보다 열등한 것도, 수능이 논술보다 내재적으로 비효율적인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정당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잘 작동할 수 있는 체제가 갖추어져 있느냐이다.

수능의 몰락은 수능의 내재적 특성이 아니라 이런 체제의 불비 때문이었다고 봐야 하며, 논술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위태롭기까지 한 면도 있다. 왜냐하면 학력고사에서 수능을 거쳐 논술에 이르는 과정은 대학입시가 공식적인 중등교과과정과 거리를 점점 더 벌려온 과정이었고, 그 거리는 논술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우리 교육이 도달한 자리가 논술이다. 그렇다면 이 제도를 잘 정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논술과 더불어 교육제도의 고삐를 쥐게 된 명문대의 책임이 더 커졌다.

2007.01.30 ⓒ 김종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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