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문제의 핵심이다  

하승수 | 제주대 법학부 교수, 변호사

정몽구, 김승연 두 재벌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 때문에 여론이 떠들썩하다. 막대한 규모의 회사 돈을 빼돌리거나 조직폭력배처럼 집단 보복폭행을 한 재벌회장에게 법원은 이번에도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 파이낸셜타임즈에서 '한국의 재벌회장들은 사건만 일어나면 휠체어를 타고 탈출한다'고 비꼰 걸 보면, 이제 한국의 사법은 국제적인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정몽구 회장에 대한 판결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판결은 판사의 가치관과 양심에 대해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점을 던져주었다고 본다. 법을 어겨도 심하게 어긴 정몽구 회장에게 '준법에 관한 강연이나 기고를 해서 사회봉사를 하라'는 판결 내용은 그냥 들었으면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시사패러디로 착각했을 것 같다. 사실 이 부분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별로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본다. 다만 그것이 사회봉사명령이라는 제도를 희화화한 것임은 분명하다. 앞으로 절도범에게는 '도난 방지에 관한 강연을 하라'고 봉사명령을 내리고, 폭행범에게는 '평화적 갈등 해결에 관한 기고를 하라'고 봉사명령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코미디 같은 사회봉사명령

게다가 재판장은 판결을 선고하면서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정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으면 국가경제가 위기에 처한다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도 참으로 모를 일이지만, 과연 재판장이 실제로 국가경제가 그렇게 걱정이 되어서 그런 내용의 판결을 선고했는지도 의문이다. 국가경제에 대한 걱정이 실형을 집행유예로 감경할 수 있는 사유도 되지 않는데 말이다.

사실 이런 판결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재벌회장뿐 아니라 뇌물을 받은 고위공무원 등 재력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법원은 유독 관대한 판결을 내려왔다. 형사판결만이 문제가 아니다. 각종 기업 관련 소송, 개발사업과 관련된 소송, 정보공개 관련 소송 들에서도 법원은 대기업이나 정부관료조직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대 이후 시민단체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사법부의 그런 판결들에 대해 비판도 계속되어왔다. 그런 비판들을 염두에 두어서인지 이용훈 대법원장이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단하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두 판결을 보면 그것 역시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런 판결들을 더이상 보지 않을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사법제도가 정의와 인권의 편에 설 수 있는가이다.

정의와 인권에 둔감한 법관의 탄생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현재의 사법씨스템 전반과 관련되어 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여러가지 문제가 존재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핵심이 다가오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면 문제의 핵심은 그런 판결을 내리고도 태연하게 '비판은 달게 받겠다'고 말할 수 있는 판사에게 있다. '비판은 달게 받겠다'는 것은 겸손한 태도가 아니라 오만 그 자체이다. 그것은 비판을 하든 말든 자신이 가진 특권적 지위에는 변함이 없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오만일 것이다.
 
사실 법원에 사법권이 귀속되는 이상 법관의 신분은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임용된 법관에게는 개별적인 재판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방법도 없다. 그래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은 아니지만, 사법부는 '견제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이런 오만의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현실을 개선하는 핵심은 법관을 제대로 임용하고 그들의 권한을 재배분하며 그들을 견제·감시할 수 있는 씨스템을 확대해가는 데 있다. 우선 지금처럼 인권과 정의에 둔감하고 기득권 옹호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쉽게 판사가 될 수 있는 씨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인권과 정의의 의미를 경험하고 고민하기보다는 실정법 지식과 법기술만 터득하면 판사가 될 수 있고, 판사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시험성적'인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법관 임용방식을 변혁해야

이런 상황에서 판사에게 올바르고 균형잡힌 가치관, 인권과 정의에 대한 신념을 지니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게다가 판사가 되면 외부로부터 대단한 대우를 받게 되고, 퇴임하면 변호사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보장되어 있다. 그런 판사가 사회에서 기득권 의식을 갖게 되고, 역시 이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법관을 어떻게 뽑고 그들을 어떻게 견제·감시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로스쿨이 도입된다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법관을 어떻게 뽑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가시화된 것이 없다. 로스쿨이든 사법연수원이든 수료하고 시험성적으로 법관을 뽑는 씨스템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 법관에게 필요한 것은 법전과 판례를 외는 능력이나 특수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라기보다는 인권의식, 정의에 대한 신념, 공익과 사회를 위한 봉사의식일 것이다.

이제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의 활동을 통해 인권의식과 가치관 등이 검증된 사람 중에서 법관을 뽑아야 한다. 그런 씨스템을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그리고 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를 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 전관예우는 아직도 존재하는 법조계의 문제이다. 이를 뿌리뽑아야 한다. 더구나 요즘에는 대형 로펌들이 고위법관 출신을 영입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주로 돈있는 사람들과 대기업에 자문하는 이들 로펌이 고위법관 출신을 거액의 연봉을 주고 데려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전관예우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신화를 재생산하는 우리 사법씨스템의 핵심적 문제이기도 하다.

국민의 사법참여로 사법개혁의 흐름을 이어나가자

한편 법관의 권한을 재분배하고 법관을 견제·감시하는 것은 국민의 사법참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내년부터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이 시행될 예정이지만, 현재의 제도는 중범죄에만 제한적으로 그리고 피고인이 원할 경우에만 적용되는 제도이다. 앞으로 국민의 사법참여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범위에 제한을 두지 않고 대폭 확대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국민의 사법참여는 법관의 자의적 판단을 제어하는 기능도 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사법의 실체를 경험하고 사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며 사법에 대한 견제·감시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법개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도 법원과 정부관료조직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두 재벌회장 판결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것은 '즉자적인 분노'가 그냥 식지 않고 사법개혁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시민사회의 몫일 것이다.

2007.9.18 ⓒ 하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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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변화, 내 안의 행복 9/19/2007 5:43:08 PM
'돈과 사법정의를 맞바꾼 판결을 거부하자'
정몽구 회장 판결,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판결 등등...돈과 사법정의를 맞바꾼 판결은 선고되었지만, 그건 국민을 납득시키지 못한 판결에 불과하다. 그런 판결을 거부한다. 아울러 그런 판결을 내린 판사도 거...
로스쿨이 바꿀 수 있는 사법의 세계  

차병직 | 변호사

사법부의 결정으로 완고한 국어학자들의 고집을 꺾은 경우라고 해도 될까. 호적부에 성씨를 '유'에서 '류'로, '나'에서 '라'로 표기할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또다른 형태의 '두음법칙'이 깨질 분야가 하나 더 생겼다. 이제 이 땅에서도 법과대학이라는 오래된 권위의 이름이 점점 사라지고 로스쿨이란 외래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전망이다.

우리 사회의 영어강박증과는 무관하게, 로스쿨이란 말은 사람들의 입에 너무나 익숙하다. 이미 십수년 전부터 떠들어대던 제도개혁 화두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로스쿨이란 단어는 사법개혁과 함께 항상 허공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의 제도 속으로 빨려들어오고 말았다. 비록 법학전문대학원이란 고리타분한 공식명칭을 달고 있지만, 독일에서조차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스쿨이라 부를 것이다.    

로스쿨, 사법개혁의 키워드

로스쿨이란 법과대학을 대체할 교육기관을 말한다. 따라서 로스쿨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지난날의 법과대학 교육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데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지다 보니 그뿐만이 아니다. 엄격하게 정한 소수의 정원을 고시로 뽑아 사법연수원이란 국가기관에서 법률실무를 교육하는 제도는 판에 박힌 예비관료만 양성하는 셈이었다. 그곳을 나온 인재들이 제각기 변호사나 판사나 검사의 길로 헤어져도 국민의 눈에는 다들 특별한 계급적 지위를 누리는 전통과 관행의 직업인으로 비칠 뿐이었다. 그래서 로스쿨 도입은 사법제도 개혁의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열쇠처럼 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스쿨의 축대가 지난 세월 동안 땅 위에 서지 못하고 공중에서만 떠돈 까닭은 불안한 열정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법률가의 수를 마구 늘려놓으면 이 나라 법률문화의 수준이 저급한 황색 주간지처럼 바닥으로 추락할까 우려한 법조인들의 견고한 보수적 충정이 매번 개혁의 창날을 막아냈다. 그 싸움은 간헐적이고도 지리하게 계속되었는데, 그야말로 한순간에 승부는 결정되고 말았다. 늘 그렇듯이, 국회는 법안을 통과시켜 마술사처럼 로스쿨을 실물로 가져다놓았다. 우연과 필연이 마구 섞인 이 투쟁과 정치적 타협의 산물은 어떤 찬반의 억측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놓이게 되었다.

정원 동결에 갈급하는 보수적 충동

꿈속의 속도는 느리지만 현실의 시간은 다르다. 시계와 달력은 인간을 재촉하는 습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내후년 봄에 문을 연다면 일년 반 남짓 남은 시간은 촉박하다. 올가을이면 로스쿨 설치를 원하는 대학들의 인가신청부터 받는다. 이 무더운 여름에 경향의 법과대학 교수들은 휴가도 연구도 모두 잊은 채 준비에 부산하다. 교육목표를 정하고, 교육과정을 만들어 내세워야 한다. 급한 대로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런저런 형태로 실무교수나 겸임교수도 초빙해 구색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더위도 잊고 준비에 몰두하면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로스쿨 법안이 통과됐다고 설립에 관한 논란이 종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 로스쿨 인가를 받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로스쿨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로스쿨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앞서 있다. 본질의 요구가 아무리 절실해도, 기득권의 이해관계가 얽힌 제도의 형식을 앞지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매년 배출하는 변호사의 수가 쟁점이다. 로스쿨 정원이 늘어나면 거의 그만큼 변호사 수도 증가할 것이라는 법조인들의 불안한 열정은 물러서지 않는 방패다. 그래서 새 제도 안에서 법학교육을 어떻게 하느냐보다 로스쿨 정원을 어느 선에서 동결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고정된 정원에 구애받지 않는 자격시험을

어차피 도입한 로스쿨이라면 그 설립과 운용의 목적이 무엇인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경험으로 익히고 이성적 토론으로 정리한 사법제도의 근본적이면서도 포괄적인 문제들을 충실하고 효율적인 법학교육을 통해 해결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우선 가치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전국 법과대학 정원을 무시한 채 터무니없이 로스쿨의 정원을 축소해서는 안된다.

"현재 법과대학의 교육과정이 법학자와 법률가를 길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로스쿨 교육과정은 실무변호사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다." 로스쿨 개원을 앞두고 한국법학교수회 사무차장 안효질 교수(고려대)가 한 말이다. 바로 그 말대로 하면 된다. 앞으로 변호사는 철저한 자격시험을 통해 배출해야 한다. 자격시험이란 고정된 정원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자격을 부여하는 일도 금물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임무를 담당할 곳이 로스쿨이다. 과정만 충실히 이행하면 국가가 요구하는 변호사 자격을 갖출 정도로 멋진 법학교육을 해내는 것이 로스쿨의 임무다.

과도기 혼란 각오하고 원칙에 충실해야

하지만 매사가 그렇듯이 장밋빛은 그리 선명하지 않다. 십여년 전 우리 사회에서 사법개혁과 로스쿨 도입을 처음 주장한 사람들이 지금은 조심스럽게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정도 간파해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도 곤란하지만, 들떠서 나서도 로스쿨의 건물은 위태롭다.

자격의 기준만 결정되면 변호사의 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변호사의 과다 배출로 인한 과도기적 혼란은 미리 예상하고 각오해야 한다. 그 정도는 참고 넘어가자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변호사나 판사를 로스쿨 안으로 끌어들인다고 실무교육이 된다는 착각에서도 깨어나야 한다. 기초교육이든 실무교육이든, 철저한 이론적 지식의 바탕 없이 잘 가르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스쿨 입학식 날짜가 달력의 숫자판 위에 어른거리는데도 따져 해결해야 할 일은 엄청나다. 이때 서로의 피로감을 덜 수 있는 방안의 하나는 이것 아니겠는가. 사법개혁의 순조로운 달성을 위한 로스쿨을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의 집착과 이해관계의 타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칙을 다짐하는 노력 말이다.

2007.7.31 ⓒ 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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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 글쓰다. 8/1/2007 11:44:58 PM
로스쿨과 사법 민주화
로스쿨이 바꿀 수 있는 사법의 세계 1. 손 무덤 로스쿨이 이토록 큰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은, 그 동안 법조인들과 변호사들의 삶이 평탄했기 때문이다. 시민의 손발인 판검사가 편했다는 것은 시민들이 그간 겪은 고통이 크다는 뜻이고, 말을 팔아 돈 버는 서비스업종 변호사가 편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그들 앞에서 '손님'들이 '왕'인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 말...
요즘 사법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차병직 | 변호사, 참여연대 집행위원장

지난주 고위법관 인사가 발표됐다. 그냥 법관도 아니고 '고위법관'이라 하면 보통 사람들에겐 조금 애매할 텐데, 쉽게 말하면 고등법원 부장판사 이상을 말한다. 고등법원 또는 지방법원의 법원장으로 임명되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것은 쉽게 표현해서 형식적이나마 수평적 이동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새로이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는 사람은 승진하는 셈이다.

과거에는 법관의 직급이 지금보다 약간 복잡했다. 관료제를 조금이나마 탈피하고자 개정한 법원조직법은 대법관을 제외한 전국의 법관을 두 직제로 분류한다. 아주 간단하게, 판사와 고등법원 부장판사이다. 내친 김에 구체적으로 밝히면, 고등법원 부장판사급으로 임명하는 자리에는 사법연수원장, 고등법원장, 특허법원장, 법원행정처차장, 지방법원장, 가정법원장, 행정법원장과 특허법원 부장판사가 있다. 그러니 인사에 관한 모든 판사들의 첫번째 관심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느냐 여부에 쏠려 있다.

출세하는 판관들과 아리송한 시민들

며칠전 인사에서도 몇사람의 판사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했다. 그러다 보니 탈락한 판사 중에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충격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불만을 품은 세속의 판관도 있을 터이다. 법관을 '판사'와 '고등부장'으로 나눈 것도 사법개혁의 분위기에 밀려 사법부가 스스로 고안한 장치의 하나다. 그러나 고등부장 승진 여부는 법관들이나 법조계 사람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이 믿을 만한 재판부 구성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가만 생각하면 우리 사회에서 사법부의 위상이란 것도 참 묘한 데가 있다. 대략 어림잡아도 벌써 10년 넘게 사법부의 이미지는 하나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개혁대상으로서의 사법부다. 10년이 지나도록 사법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아도, 여전히 사법부 안팎의 사정은 동상이몽 격이다. 대강의 방향에서는 꽤 생각의 차이가 좁혀졌지만, 근본적인 데서는 여전히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것이 개선이든 혁명적 변환이든, 사법개혁의 왜 이리 지지부진할까?

낯부끄러운 외면 속에 왜곡당하는 진실

최근에 일어난 몇가지 사태도 갑갑한 사법개혁의 행보와 관련이 있다. '사법살인'이란 한마디로 상징됐던 인혁당사건은 재심에 의해 무죄가 선고됐다. 시대의 우울을 그대로 말해주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송두리째 다시 씌어져야 하는 재판이었다. 그 판결 하나는 국민이 바라는 사법개혁의 과제 아래서는 누구나 승인하는 긍정적 행위였다. 하지만 불행했던 과거 사법사의 얼룩 하나를 지우개로 문지르는 듯한 감격은 그리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무죄선고가 있은 다음날 그 역사성을 제대로 다룬 신문은 <한겨레>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현실이 우리 사법개혁 행진에 비친 불안한 조짐이다.

그 께름칙한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70년대 긴급조치 위반사건 유형을 분석한 보고서의 발표를 두고 소란이 일었다. 위원회는 판결을 그대로 공개할 계획이었을 뿐인데, 일부에선 당시 관여 법관의 명단을 발표한다고 격분했다. 판결문 말미에 기재된 판사의 성명은 공문서 내용의 일부이자 누구나 열람하고 확인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부분을 확대해서 '명단 발표'라고 떠들어대는 일 자체가 반개혁적인 보수적 선정성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논란을 부추긴 언론에 힘입어 대한변호사협회는 "다수 국민의 찬성으로 제정된 유신헌법에 의한 재판까지도 비난대상으로 삼는 것은 또다른 국론분열을 초래할 위험이 크다"고 논평했다.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이란 단체에선 '현정권의 재집권을 위한 정략적 의도'가 보인다면서 위원회를 해체하라고 성명했다. 법관의 이름이 드러나는 일에 흥분하여 반대하는 걸 보면, 그 판결의 부끄러움을 인정하는 데는 국론의 분열이 없는 것 같아 다소 위안이 된다.

형식과 관행, 그리고 그 이면의 편의주의

그보다 또 며칠 전에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된 기사가 담고 있는 의미도 새겨보아야 한다. 속칭 에버랜드사건에서 '공소장 변경'이 문제가 됐다. 공소장이란 검사가 제시한 피고인의 범죄사실 또는 판사가 담당해야 할 구체적 심판대상을 기재한 서면을 말한다. 공소장은 법률적 필요에 따라 변경하기도 하는데, 반드시 검사가 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서면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재판장이 밝힌 공소장 변경 사실을 검사나 변호인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재판장이 큰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 실수는 관심을 가진 기자의 취재에 응답한 재판장 자신의 말에 의해 분명해졌다.

처음엔 거듭하여 공소장 변경을 직권으로 했다고 대답했는데, 공소장은 재판장이 직권으로 변경할 수 없다. 뒤에 가선 검사나 변호인의 양해를 얻어 행한 것이라고 변명 자체를 변경했지만, 그 사태는 우리 재판이 얼마나 형식과 관행에 치우쳤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중대한 것이다. 법원은 소송에 관여한 사람들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해프닝 정도로 정리하고 마감한 듯한데, 그 역시 법원의 편의적인 사고처리 관행이자 반성의 방식이다. 허위공문서 작성까지 거론할 수 있는 그 사건은, 당사자인 검사와 삼성 측이 여론을 의식해 나서지 않아 그 선에서 멈추었지만, 언젠가 면밀하게 비판될 여지는 남아 있다.

사법개혁,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가

이렇게 어제 오늘 일어난 몇가지 일들만 더듬어보아도, 우리 사법의 문제가 무엇이며 사법개혁이 왜 형식적 개선의 끄트머리에서만 오락가락하는지 알 만하다. 사법부는 잘못에 대한 인식과 성찰의 기본태도부터 다시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근원적 변화는 제도의 개혁 이전에, 또는 늦어도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당위의 내용과 절차를 다가온 대선과 정권교체에 맞춰 정치공세로만 이용하려는 보수세력도 의사를 표현하는 어법을 시대에 맞게 공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한 정의와 도덕과 역사에 대한 기본 논쟁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사정이 진정 그렇다면 좀 기운이 빠진다. 대다수 국민들이 억울함을 눌러가며 승복할 수 있는 법원을 가져보자는 희망이 사법개혁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원론부터 다시 따져보고 난 뒤에 개혁을 시도해야 할 지경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신문 귀퉁이에 난 고위법관 인사 기사나 읽고 감상하며 세월을 기다려야 옳단 말인가?

2007.02.06 ⓒ 차병직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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