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도종환 | 시인

어제 ㄱ생명에서 사외보를 만드는 심아무개 박사한테서 메일이 왔다. 내 시 〈흔들리며 피는 꽃〉을 이번 호에 재수록하려고 하는데 원문이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메일이었다. 그는 이 시를 인터넷에서 가져왔다고 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은 2연으로 된 짧은 시이고 많이 알려진 작품이기도 해서 시가 들어 있는 첨부파일을 열어보지 않고 그냥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하고 답변 메일을 쓰다가 혹시나 해서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2연으로 된 이 시에 3연이 한 단락 더 붙어 있었다. 이 시의 1연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로 시작해서 5행 정도의 내용이 이어지고, 2연은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로 시작해서 5행 정도의 시가 서로 댓구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누가 “아프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로 이어지는 3연을 만들어 붙인 것이다. 앞의 내용과 똑같은 구문, 똑같은 어법으로 말잇기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학생들과 수업시간에 시 공부를 하면서 '모방하여 쓰기'를 하는 적이 있는데 꼭 그같은 방식으로 씌어진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만약 무심결에 확인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글이 내 시가 되어 사보에 실리고 그것이 또 사람들 사이에 옮겨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주에는 서강대학교 교지 편집장이 내 시 〈그렇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가 이번 호의 기획 내용을 모두 아우르는 것 같다며 교지의 여는 시로 싣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그런데 나는 이런 제목의 시를 쓴 적이 없다.   
 
내가 쓰지 않은 내 시?

인터넷에는 이런 식으로 변형된 시들이 수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달포 전에 어느 방송국의 〈하늘만큼 땅만큼〉이라는 일일연속극에서 내 시라고 소개된 글이 있었다. 극중 사제간 커플인 종훈(홍요섭분)과 명주(윤해영분)의 결혼식 장면에서였다. 명주는 20년이나 변함없이 선생인 종훈을 짝사랑해왔고, 그런 그들이 보여주는 색다른 결혼식 장면이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양가 가족들만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엔 주례도 주례사도 없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명주와 종훈이 직접 혼인서약을 했다. 명주는 "편한 친구처럼 같이 걸어가겠다"며 종훈과 인생을 함께할 것임을 피력했고, 종훈은 백마디 말 대신 도종환 시인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란 시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이날 종훈이 결혼식장에서 읊은 시는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순위 상위권에 오르는 등 많은 관심을 모았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말없이 마음이 통하고 그래서 말없이 서로의 일을 챙겨서 도와주고 그래서 늘 서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런 사이였으면 좋겠습니다. 방풍림처럼 바람을 막아주지만 바람을 막아주고는 그 자리에 늘 그대로 서 있는 나무처럼 그대와 나도 그렇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이 맑아서 산 그림자를 깊이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을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산과 물이 억지로 섞여 있으려 하지 않고 산은 산대로 있고 물은 물대로 거기 있지만, 그래서 서로 아름다운 풍경이 되듯 그렇게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목 변형, 내용 첨삭, 오탈자... 시의 수난시대

이 시의 제목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로 되어 있다. 아마 문장 종결구인 “…면 좋겠습니다”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글은 시가 아니라 내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134면에 수록되어 있는 〈강물에 띄우는 편지〉라는 산문의 일부분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 의해 행갈이되고 제목이 붙고 시로 바뀌어 인터넷에 떠돌아다니고 있다. 시라면 제목을 이렇게 붙일 수가 없다. 그러다가 이제는 TV드라마에까지 시라고 소개되고 만 것이다. 올해 초 어느 기업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이 글을 시로 오해하고 시낭송을 하는 걸 본 적도 있다.

이 장면이 방송되고 난 뒤에 많은 문의 전화와 메일을 받았다. 그 시가 어느 시집에 실려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글이 시였다면 시집이 많이 나갈(?) 뻔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의 다른 버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네티즌들이 저마다 자기 희망사항을 담은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를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의 소망을 담은 시를 자기 이름으로 올리지 않고 내 이름으로 올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쓴 적이 없는 내 시들이 싸이버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원문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나오는 경우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담쟁이〉라는 시는 중간에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옮겨적는 이가 "푸르게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라고 바꾸어놓았다. 바꾸었다기보다 앞 행의 ‘절망’까지 쓰고 다음 행의 '절망' 이후를 붙여쓰는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 원형 존중하는 디지털 문화의식

그런데 이대로 돌아다니며 수많은 책과 싸이트와 행사에서 재인용되고 있다. 내게 확인요청이 오는 경우에만 바로잡아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시가 노래로 만들어질 때도 어쩔 수 없이 조금씩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그 바뀐 노랫말이 시의 원문처럼 인식되는 사례도 허다하다. 나만 이런가 하고 동료시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다들 이구동성으로 같은 하소연을 한다. 정호승 안도현 시인 등도 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저마다 자기 싸이트의 주인이 되어 얼마든지 글을 쓰거나 옮겨서 싸이버공간을 채울 수 있는 세상이다 보니 부정확하고 믿을 수 없는 글이 범람하고 있다. 원문과 다르고 너무 엉뚱한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축소, 확장되고 또 왜곡된 글이 많다. 그런데도 사실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퍼다가 인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일이 손쉬워진 반면 작품이 훼손될 소지가 많아진 것이다. 그런 글을 원문에 맞게 정리하고 바로잡아주는 백신프로그램이 개발되거나 싸이트가 만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2007.6.26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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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롤랑의 꿈 6/26/2007 9:59:37 PM
창비주간논평-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을 읽고
블로그를 하는 나조차도 맘에 드는 시를 한두번은 해당 작가명과 함께 인터넷 페이지에 올린 기억이 난다. 물론 어느 책에선가 정확히 옮겨 적어 놓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중요한 것은 원작자의 틀림이 없는 텍스트인지에 대한 의식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도종환님의 창비주간논평을 읽으면서 깨닫는 게 많다. 웹에 떠다니는 많은 이야기들이 복사되고, 변형되고, 마구잡이...
엔디, 글쓰다. 7/8/2007 6:15:00 PM
시니피앙을 잃어버린 시
인터넷에서 수난받는 시작품들 별이 갈 길을 비추었던 서사시의 시대를 동경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의 시는 '향유'된다기보다는 '소비'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는 늘 절망한다. 나는 좋은 시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재생산이란 하나의 시가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 속에 다른 울림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생산 과정에서 ...
젊은 시의 산문화에 대하여  

박형준 | 시인

최근 우리 시단의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는 산문화(散文化) 경향이다. 한 젊은 시인의 고백은 흥미롭다. "시가 스스로를 갱신하는 한 방편(사실은 가장 크고 효과적인 방편)으로 저는 산문을 꼽고 싶습니다. 시가 시에만 매달릴 때 딱딱한 석고상 이상의 자세를 못 보여주는 한계를 시 바깥에서 꽝꽝 깨고 들어오는 것이 산문인 것 같습니다."(김언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자])

최근 들어 소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젊은 시문학에서는 '상징의 해체'가 대세를 이룬다. 이들은 상징이 근원 혹은 기원과의 합일을 꿈꾸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일치한다는 '향수'에 기반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신들의 시는 이것을 말하고 저것을 뜻하기에 차이의 수사학이라고 명명한다. 유추와 동질이라는 상징과 달리, 이것을 말했는데 시간이 흘러 저것을 뜻하기에, 언어가 실체를 지칭하지 못하는 어긋남의 수사학이 되는 것이다.

우리 시는 바야흐로 '산문의 시대'이다. 역사에 의해 호명되는 '명령을 요구하는 밤'(김수영) 따위로서의 산문은 잊혀진 지 오래이고, 지금은 시가 산문 그 자체를 사는(生) 시대이다. 따라서 이들 젊은 시인들에게는 '기원의 해체'가 또다른 명령이며, 여기에는 권위적인 '하나의 화자-상징'을 해체하고 '복수의 화자-알레고리'를 내세우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 수립된다. 그러나 낡은 시라고 여겨지는 그 기원들에 과연 낡은 것들만이 있는 것일까.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즉 '시가 시에만 매달리는') 운문 형식으로 된 다음의 시는 '딱딱한 석고상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소릉조] 전문)

'70년 추석에'라는 부제의 이 시는 30년대에 (음악성을 살리는 방편으로) 유행했던 2행 띄기 등이 계승된 전형적인 시이다. 1연에서 5연까지에는 하나의 화자가 나타난다. 견해에 따라서 6연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연의 돈호법은 이 시를 아주 다른 각도에서 읽게 만든다. 과연 6연까지의 시적 화자가 7연에 나타난 화자인가? 전체 시를 유기적으로 통어한다는 신비평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 돈호법은 앞의 것을 묘사하는 진부한 장식적 수사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수사학적 질문으로만 읽는다면 앞의 '나'와, 생략되어 있지만 뒤의 '나' 사이에는 정확히 구별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내포된다. 어쩌면 마지막 연에는 좀더 위대한 주제와 진술의 복잡성을 이끌어내는 화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화자가 전체를 통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어되는 시적 화자를 바라보는 또다른 주체의 등장이 이 시에 있다.

최근에 나온 고형렬 시집 『밤 미시령』의 대표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달려라, 호랑아]도 역시 다른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자화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블레이크의 [호랑이]에 견줄 만한 시적 드라마가 풍부하게 내장되어 있다.

달려가는 호랑의 껍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두 앞발 사이 깊숙한 가슴 근육
덜겅거리는 심장, 출렁이는 간, 긴장하는 목뼈
헉헉대는, 터질 듯한 강한 폐 근육
얼룩거리는 붉은 어깨와 엉치등뼈, 거기 붙은 살점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커다란 구슬 같다
마구 흔들리는 골은 산산조각 깨어질 듯
무거운 육신을 잔혹하게 흔들며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모자이크된 육체가 뛰어가는 정신
주먹같이 생긴 허연 뼈들, 링 같은 꽃의 구근
기둥 같은, 널빤지 같은 뼈들이 가득한 육체
먹이를 뒤쫓아 맹추격하는 호랑의 구조
그놈들 가끔 보며 세상을 가르친다 지오그래픽의
제작자를 탓하지 않지만 생식기를
혹주머니처럼 흔들며 뛰어가지 않으려는 그의
부끄러운 표정의 질주를 비웃는다 이것이 '세계'를 보는
나의 유일한 창구, 한없이 저놈은 비위사납다
이해하면서 더러운 자식! 더러운 자식! 하며
달려라 조금만 더, 뛰어라 호랑아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라 (진술부 강조는 인용자)

묘사부만 읽으면 쉼표로(즉 호흡으로, 음악적 요소로) 호랑이의 동물성을, 특히 움직임을 급박하게 밀어올리고 있는 호랑이가 포착된다. 반면 진술부는 사유로, 그래서 느린, 생각하는 화자가 등장한 다. 여기서 과연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묘사하는 화자, 그리고 진술부의 어떤 발언을 하는 화자는 일인인가? 또 맨 마지막 연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 달려라"의 '너'는 이제까지 묘사하는 시적 화자, 진술하는 시적 화자와 동일인인가? 아니면 호랑이인가? 이 시는 이렇듯 하나의 화자로 규정되지 않는, 그래서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다성적인 울림을 던져준다. 고형렬의 이번 시집이 뛰어난 점은 이런 육화된 모호성, 망각되는 주체들에 대한 새로운 비유에서 찾아도 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기원을 흐려버리는', 그래서 '미래'로 탈주하는 최근 시보다는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 기원에서 뭔가를 찾는, 거기서 재해석하고 거기서 재설정하는, 그러나 망각될 수밖에 없는 기원의 흔적을 현재(현대)의 자신에게 투사하는 시편들에 매력을 느낀다. 하나의 화자이든 둘 이상의 화자이든, 산문을 지향하든 음악을 지향하든 시는 시일 뿐이다. 어느 중견시인이 통렬하게 젊은 시인들의 시를 비판했듯이, 필자 역시 '시가 아닌데, 기표로 포장된 시라고 하는 산문의 지리한 또다른 교술'적 시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것이 재래적 시이든 새로운 세대의 시이든 말이다. 물론 '미래파'로 규정되는 현재의 젊은 시들을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시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싯점에서 필요 이상으로 확대되는 담론에 고개가 갸웃해진다는 말이다.(시인은 원래 자기 시를 말하지 않는 법인데, 왜들 그렇게 자기 시를 미리부터 말하고 싶어하는 걸까. '도달'을 설정하면, 그것도 자기 시의 비밀로 평생 간직해야 할 '노름돈'을 내가 "얼마 있소" 하고 말해버리는 꼴이 아닐까.)

시란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열망을 지닌 것이다. 그래서 "너를 끌고 달리게 하는 아 호랑아"를 지향한다. 기원을 회복하기 위해 절규하는 이 모호하고 다성적인 목소리야말로 언제나 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고, 알고 싶다는 것이 필자가 시를 대하는 자세이다.

2006.05.09 ⓒ 박형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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