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대망론에 거는 기대와 우려   

권성우 | 문학평론가, 숙명여대 교수

한국소설의 위기를 장편소설의 활성화를 통해 돌파하자는 제언들이 최근 부쩍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한겨레신문 최재봉 기자의 〈한국소설, 장편으로 진화하라!〉(《한겨레》2007.1.1)로 촉발된 이러한 논의는,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장편소설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한국일보》2007.1.10)에 이어 《창작과비평》 2007년 여름호의 특집기획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를 통해 한층 구체적이며 포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창작과비평》의 최근 논의는 장편소설에 대한 작가들의 육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대 소설문학의 진로에 대한 소중한 참조가 되리라고 본다.

단편 중심의 소설문학에서 탈피하여 장편소설의 활성화를 기대하는 이러한 논의들이 지금 이 시대 소설문학의 침체를 극복하고 새로운 소설의 시대를 열어젖히고자 하는 진지한 모색의 일환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아울러 최근의 장편소설 대망론이 국제화시대에 한국문학의 위상을 제고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창조적 장편의 시대를 대망하는 몇몇 논자들과 《창작과비평》의 입장에 한편으로는 공감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이 논의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몇몇 지점들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그 점들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한다.    

장편소설론, 역사에서 배운다

모든 비평적 논의는 반복된다(나는 최근에 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비평가 임화[林和, 1908~1953]를 연구하면서 그가 약 70년 전에 고민한 비평적 과제들이 지금 이 시대의 그것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바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 이 시대의 문학논점에 대해 온전히 얘기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시선을 지닐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 말에도 장편소설론이 활발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김남천(金南天) 등에 의해 제기된 장편소설론은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화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문학의 현실성과 총체성을 창조적으로 복원하며 당시의 소설문단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시도로 전개되었다. 말하자면 당시 제기된 장편소설론은 단지 소설의 분량이나 형식 차원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첨예한 시대사적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것은 또한 이념과 일상의 괴리 속에서 어떠한 장르를 통해 시대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했다.

가령, 김남천의 〈조선적 장편소설의 일 고찰〉(《동아일보》1937.10.19~10.23), 〈장편소설에 대한 나의 이상〉(《청색지》1938.8), 〈장편 소설계〉(《조선문예연감》1939) 등에서 당대의 사회적 상황 및 저널리즘과의 교섭문제, 비평의 기능, 신문과 출판의 상업주의, 통속성 등에 대해 두루 언급하고 있는 것이 그 예다.

장편소설의 강조 속에서 놓칠 수 있는 것들

이에 비추어볼 때,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장편소설 활성화론은 세계관의 문제, 문학적 가치의 문제, 시대사적 전망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1930년대 말에 제기된 장편소설 논의가 지금 이 시대의 문학적 정황에 기계적으로 대입될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대 소설문학의 위기가 단편소설을 장편소설로 대체하는 방식으로 온전히 돌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일면적인 견해일 따름이다.

이미 소설가 황석영이 수차 지적한 대로 이 시대 소설문학의 위기는 현실에서 멀어지면서 시대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 소설문학의 위기를 제대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소설 형식이나 분량 차원의 문제의식에서 더 나아가 과연 어떠한 방식의 소설쓰기가 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긴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장편소설의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제언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더라도, 저널리즘, 출판 등의 문학제도가 "점점 강화되는 자본의 포섭"(최원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 시점에서 그러한 자본의 포섭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 중단편소설에 있다는 점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상업적 이해관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중단편소설이 꾸준히 활발하게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외국문학과 변별되는 우리 소설문학의 독자성이자 특수성이리라. 이러한 점들이 과연 극복과 청산의 대상인가 하는 점은 좀더 엄밀한 고려와 심화된 토론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계간지 중심 문학제도의 양면성

또한 계간지 중심의 문학제도가 장편소설의 활성화에 장애가 된다는 의견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창작과비평》을 보자. '창비'는 푸꼬적인 의미의 문화권력이면서도 동시에 제도에 대해 성찰하는 비판적 지성의 참호이기도 하다. 이러한 계간지의 양면적 성격에 대한 열린 이해가 필요하다.

문예계간지의 비판적 성찰의 역할과 대화적 비평의 기능이 온전히 활성화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볼 때, 경우에 따라 장편소설의 무원칙한 양산은 그나마 소극적으로 유지되고 있던 계간지의 긍정적 역할과 비판적 성찰의 기능을 제도적으로 축소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러했을 때, 한국소설의 장편화는 안 그래도 심각한 출판상업주의를 한층 노골적으로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리라. 그러한 과정은 장편소설의 상업적 가능성에 비평적 성찰의 역할을 종속시키는 결과를 동반할 수도 있다.

시대적 성찰과 비평적 대화로 진정한 장편시대를

물론 나는 지금보다 장편소설이 한층 활발하게 창작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견도 없다. 다만 장편소설 대망론에 앞서 시대적 성찰과 비평적 대화의 복원을 통해 장편소설의 가치와 작품의 질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가능한 문화가 전제되었을 때, 장편소설의 진정한 융성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 문예지 상호간에 작품을 둘러싼 논쟁과 해석학적 대화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현재 이러한 대화가 부족하다는 점이 바로 이 시대 소설의 위기를 가져온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토론과 비평적 기능의 활성화는 앞으로 이 땅의 장편소설이 진정한 문학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비판적 지성의 산실이었던 '창비'가 지금까지 제기한 문제의식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열린 비평적 거점이 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창비의 장편소설 대망론이 한국소설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긍정적인 촉매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2007.6.12 ⓒ 권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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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독자들은 한국문학을 어떻게 읽을까  

한국문학 번역의 과제들

안선재(Brother Anthony) | 한국문학 번역가, 서강대 명예교수

한국인들은 흔히 한국문학이 해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번역 출간된 작품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2001년 이후에 70편이 넘는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작품 수는 분명히 그보다 더 많다. 자주 듣는 또다른 말은, 한국문학의 번역은 형편없어서 노벨문학상 같은 것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첫번째 답변은, 최근에 작품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들도 있다는 것이다. 번역과 성공적인 마케팅은 노벨상을 타는 선행조건이 아니다. 두번째 답변은 지난 10년간 내가 봐온 한국문학 번역작품은 원작의 내용을 충분히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상당히 괜찮다는 것이다. 세번째 답변은 노벨상 수여기관인 스웨덴 왕립아카데미 회원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씌어진 문학작품을 비교하여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 명백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 그들이 내린 판단은 대부분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한국문학 번역에 대한 동상이몽

그러나 한국문학의 번역과 홍보가 당면한 문제는 분명히 있다. 첫째, 번역될 작품을 선정하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의 문화, 정부 관계자들은 대개 이미지 선전으로써 한국을 전세계에 알리려는 총제적인 캠페인의 일환으로, 널리 상찬되고 정평있는 '유명한' 한국작가들의 번역을 추진하려고 한다. 한국문학사를 가르치는 학계의 전문가들은 본인들이 판단하기에 근대 한국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작품을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오늘날 해외의 상업출판업자들의 관심은 단 한가지에 집중된다. 즉 그들은 재정적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자기들의 위신을 보장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팔리는 작품을 출판하려고 한다. 한국측의 '문헌적 정보' 프로젝트와 '성공・수익'에 대한 외국 출판업자들의 요구 사이에는 직접적인 갈등이 있는데, 이 갈등은 런던이나 빠리, 뉴델리 등지에서 현재 어떤 종류의 문학작품이 잘 팔리는지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잘 모르기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문학 번역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므로 전세계가 그 한국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일은 없다. 최근에 나는 한 유명한 한국작가가 너무 많은 젊은 한국작가들이 1인칭 화자를 도입해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사실적인’ 스타일로 창작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들었다.

세계문학으로 진출하려면 국제감각부터 익혀야

그의 비판은 (나는 그 논평의 전문을 보지 못했지만) 많은 한국문학 작품에서 서술자의 복합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읽은 많은 한국 소설은 시작에서 출발해 간혹 회상이 섞여 들어가는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고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 어색한 결말로 끝맺는다. 외국의 성공적인 소설은 이렇게 창작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문학을 '세계화'하기를 바랄 때 한국이 당면한 단 하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오늘날 세계의 가장 탁월한 작가들이 어떤 작품을 생산하고 있는가에 대해 한국 작가들과 독자에게 교육하는 것이다. 현재 번역과 출판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 문학작품을 바깥에 소개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동시대 외국의 탁월한 작가들을 한국독자에게 알리는 일이다. 전해지는 근래의 일본소설의 성공담은 그 점을 확인해준다.

많은 기성 한국작가들의 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을 현대인의 시청각매체에 대한 집착 탓으로 손쉽게 돌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독자들이 뭔가 더 나은, 진정으로 새롭고 즐거운, (최소한 때때로) 생각을 자극하는 그런 작품을 원한다는 사실의 징표이기도 하다. 양질의 현대 세계문학의 번역을 한국의 출판인들이 지원하지 않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해가 되는 일이다. 

외국독자들이 말하는 한국의 시와 소설

오늘날 세계에서 시는 대부분 잘 팔리지 않는다. 상을 타고 비평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익을 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 시가 지난 20년간 한국소설보다 영어로 그렇게나 많이 출간되었는가? 나 자신만 해도 시집을 거의 20여권을 번역했지만 번역한 소설은 3권에 불과하다.

이 물음에 대한 한가지 답변은, 한국 시는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고 활기차다는 것이다. 많은 한국 시인들은 번역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으로 특정한 한국적 삶의 경험에 대해 쓴다. 그들의 시는 살아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독특하게 인간적이다. 물론 그 시적 효과를 위해 주로 한국어의 특징에 의존하는 시인들은 번역으로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외국독자들에게 어떤 한국 시들의 영향은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으레 이렇게 묻는다. "작품이 왜 이렇게 우울한가?" 시는 자주 고통스러운 상황에 복합적이며 개인적인 반응을 간결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인 목소리를 듣게 한다. 물론 소설은 시의 한 형식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한국 소설가들은 이 점을 보지 못하고 있다.

우아한 문체, 다양한 서술 리듬, 해석의 모호함, 여러 서술자들의 목소리, 글쓰기 전략에서의 복합성 등은 모두 시로서의 소설이 갖는 근본적인 특성들인데, 한국 작가들의 작품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체면치레하지 말고 치열하게 비판하라

물론 어느 면에서는 한국작가들이 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효과적인 대화가 성숙되지 않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는 탓도 있다. 서평 형식으로 (때로는 맹렬하게) 표현되는 문학비평은 국제적인 문학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모든 작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자기에게 너그러운 것이다. 사려깊고 도전적인 비평 없이 어떤 작가가 기량을 연마하고 약점을 고치고 성숙한 예술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희망할 수 있겠는가? '체면'과 '명성'이 핵심 고려사항인 한국 같은 문화에서 정직한 비평은 자주 거부된다. 이건 큰일이다.

만약 다른 나라에서 창작되는 작품과의(반드시 북미나 유럽의 작품일 필요는 없다)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 한국문학이 다시 태어나려면,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