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목고가 폐지되어야 하는 이유  

이종태 | 한국교육연구소 소장

올봄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교육 관련 쟁점은 단연 대입정책을 둘러싼 이른바 3불정책 논란이다. 대입본고사와 고교등급제 그리고 기여입학제를 금지하는 3불정책은 비록 정부가 명명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대입 선발과정에서 움직일 수 없는 원칙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그런데도 일부 대학의 입시관계자와 사립대 총장들이 불을 붙이고 여기에 일부 언론들이 기름 붓고 부채질을 하면서 급기야 대통령과 부총리까지 나서서 불을 끄는, 볼썽사나운 소모전이 전개되고 있다.

3불정책의 정당성과 한계, 그리고 그 대안 등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의견을 제시했기에 군더더기 의견을 덧붙이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대신 3불논란의 그늘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사실상 소모적 논란의 연료를 제공하고 있는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 문제를 거론하려고 한다.   

특목고, 대학-언론-중산층의 교육카르텔

본고사 실시나 고교등급제 도입 주장의 저변에는 특목고나 비평준화 지역 명문고 출신 학생들에게 더 유리한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대학과 언론, 우리 사회 중산층 간의 무언의 카르텔이 작용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비교적 단순해 보인다. 특목고 학생들은 이미 치열한 경쟁의 과정을 거쳐 우수한 자질을 지니고 있음이 입증되었으므로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이 대학과 사회 모두에게 유용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차마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특목고 출신 학생들의 가정배경이 탁월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고려된다고들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단순 논법이 실질적으로 얼마나 타당한 논거를 가지고 있을까?

우선, 특목고란 무엇인가부터 따져보자. 특목고는 1973년 고교 평준화정책의 시행과정에서 일부 학교의 설립목적상 특수성을 인정하여 신입생의 추첨배정 대신 자체 선발권을 인정받은 학교를 가리키는 말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특목고 제도는 해당 학교들에 대한 특혜시비로 얼마 가지 않아 폐지되고 실업계열에만 한정해 유지되었다.

일반계열 특목고의 제도화는 1980년 7·30 교육개혁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과외 금지와 대입본고사 폐지를 골자로 하는 이 조치 속에는 영재교육의 활성화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근거로 과학과 어학 분야의 영재를 기르기 위한 특목고 설립이 계획되었다. 이에 따라 1984년 과학고등학교가 설립되었고 이어 노골적인 중산층 선호 정책을 펼쳤던 6공화국 정부에 의해 1992년 외국어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국제고등학교는 5·31 교육개혁의 결과로 1998년에 처음 개교했다. 

허울뿐인 특목고 영재교육의 실체

특목고의 형성과 팽창 과정은 두가지 요소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평준화 도입 초기부터 예외적 조치를 통해서라도 차별적인 교육기회를 만들어내려는 욕구가 강하게 있었다. 이것이 특목고 도입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동력에 형태를 부여해주는 동시에 평준화 기조를 우회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영재교육’ 담론이었다.

따라서 특목고가 처음부터 가면이나 다름없던 법령상의 목적인 영재교육을 무시하고 그것의 진짜 목적인 성적 우수자 선발과 명문대학 진학에 몰두한 것은 예정된 행로였다. 당연히 특목고 학생 선발의 핵심 기준은 영재성 여부보다는 일반 교과성적이 된다. 외고의 경우 이런 문제는 특히 심한데, 왜냐하면 외고의 설립근거가 되는 ‘어학 영재’는 학문적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전형에서 중시되는 것은 경시대회와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이나 토플 등의 성적이며, 이런 성적을 보증하는 것은 치열한 선행학습 아니면 조기 유학이 될 뿐이다.

교육과정 운영은 더 가관이다. 국가교육과정으로 고시된 특목고의 교육과정부터 기본구조 자체가 영재교육과는 거리가 있을뿐더러, 가르치는 교사들도 대개는 영재교육에 필요한 소양과는 무관하게 임용되거나 충원된다. 입시 위주의 편법 운영도 만연되어 있다. 외고의 경우 보통 서너가지의 외국어과를 설치하고 있지만 대체로 학생수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일 뿐 주로 영어에만 목을 매고 있으며, 공식적 교육과정에 없는 국제반이나 자연계열 과목을 편성, 운영하여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일반고와 같은 규모의 학급을 유지하는 외고와 달리 모두 공립인 과학고는 학급당 인원이 15명 안팎이어서 양호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현재 70% 정도의 학생들은 2학년만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고 있어 1학년의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을 빼면 정작 과학고 교육과정의 핵심인 전문과정은 절반도 이수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는 셈이고 따라서 막대한 국민세금만 낭비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편협한 교육과정 운영으로 대학에서는 과학고 출신 학생들의 인문적 소양이 너무 부족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3불 폐지? 특목고 폐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대상이며 교육적 논란의 원인이 되고 있는 특목고의 실체는 그 법적 존재기반인 영재교육과는 사실상 무관하고, 단지 부모의 경제력과 문화적 역량을 바탕으로 교과성적에서 경쟁력을 지닌 학생들을 위한 특권적 놀이터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3불정책 폐지 논란은 이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거나 한 배를 탄 사람들이 벌이는 한판 굿인 셈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우리 사회가 ‘3불 폐지’가 아니라 ‘특목고 폐지’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세가지이다. 첫째, 특목고의 존재는 교육과정에 노골적인 거짓말을 도입하고 있다. 특목고는 법령에 규정된 설립목적을 공공연하게 부정할 뿐 아니라 최근 일부 특목고에서 저질러진 내신 조작이나 SAT 부정시비에서 보듯이 비교육적인 파행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 되었다. 둘째, 특목고의 존재는 입시경쟁을 고등학교 단계에서 초등학교 단계로 끌어내림으로써 사회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망국적인 사교육비 경쟁을 끝없이 부추긴다. 

우물 안에서 벗어나 교육의 새판을 짜야

셋째, 특목고의 존재는 성적 경쟁에만 몰두하는 퇴행적인 교육방식을 강화시켜 지식기반사회 등 새로운 사회에 대비한 교육의 발전에 심대한 해악을 끼치고 있다. 이런 교육의 결과가 어떤지는 특목고를 나와 국내외 명문대학 진학에는 성공했지만 중도하차하거나 아무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많은 학생들의 사례가 이미 웅변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는 세칭 명문학교 입학이라는 우물 안의 성공을 위한 소모적 경쟁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우리에게 닥쳐올 미래의 도전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 교육의 새판 짜기가 필요하며, 이런 새판을 짜기 위한 전제조건 가운데 하나가 병리적인 현행 특목고의 폐지라고 할 수 있다.

2007.04.24 ⓒ 이종태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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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엘리뜨의 퇴행성 본고사주의   

김종엽 | 한신대 교수

지난달 21일 서울대 장기발전위원회가 교육부의 3불정책을 대학경쟁력의 암초라고 주장하고 나서고부터 3불정책이 논란거리이다. 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이 세가지를 입시전형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교육부의 3불정책인데, 정책의 이름으로서는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다. 정부가 힘이 세다면 이런 정책 명칭은 사회집단의 행동을 규율하는 가드레일의 간명한 이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들 정책 내용 가운데 하나에만 반대해도 모두 그 정책에 반대하는 집단에 정렬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연전의 '4대 개혁입법'이 개혁입법 가운데 하나에만 반대하는 집단도 모두 4개 개혁입법 저지세력으로 결집하게 만든 것과 비슷한 꼴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나쁘다. 왜냐하면 4대 개혁입법이라는 명칭은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개혁에 반대한다는 부담을 지게 하지만, 3불정책이라는 명칭은 반대진영이 마치 국가의 부당한 금지와 성가신 개입에 반대하는 것으로도 비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3불정책 반대하는 서울대와 사립대의 따로 또 같이

세가지 입시전형 방법을 묶어서 금지함으로써 생긴 이런 부작용은 이번 논란에서 실제로 나타난 듯싶다. 이번 논란은 서울대가 '총대'를 메고 시작한 셈인데, 그런 서울대가 정작 기여입학제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서울대를 바로 거들고 나선 사립대 총장협의회 회장단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추정컨대 기여입학제일 것이다. 그런데 둘이 사이좋게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아무튼 논란이 커진 이유는 3불정책의 고수와 폐지 주장의 바닥에 놓인 것이 교육을 둘러싼 계급갈등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계급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갈등, 그러니까 제도 변화가 불러올 이해관계의 변화에 대한 각 집단의 계산에서 촉발된 대립만은 아닌 것 같다. 거기엔 적어도 역사적 경험이나 집단의 습속 같은 것이 개입해 있고, 그렇기 때문에 3불정책을 공격하는 집단들, 이번 경우 서울대의 발언에는 명백히 계산된 이익 추구와는 다른 어떤 소신 내지 확신이 어른거리게 되는 것 같다. 왜 그런 것이고, 그 소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따져보자.

금지된 세가지 가운데 기여입학제는 논의의 대상에 올릴 만한 것이 못된다. 윤색된 이름이어서 그렇지 대학입학 구매제에 지나지 않는 기여입학제는 세상 어디에서도 시행되지 않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본고사와 고교등급제인데, 이 가운데 고교등급제는 연좌제 성격이 있어서 도입되기도 어렵지만, 이미 낮은 실질 반영률로 무력화된 내신을 생각하면 굳이 도입을 생각할 이유도 없다. 더구나 이 제도는 본고사가 허용되고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 아무 필요가 없다. 결국 3불정책이라고 하지만 핵심은 본고사이며, 이번 논란을 불러들인 서울대가 노리고 있는 것도 본고사라고 할 수 있다.

'本考査' 그 이름의 복권에 숨은 엘리뜨주의

그렇다면 왜 본고사가 문제인가? 왜 서울대는 그토록 본고사에 집착하는 것일까? 나는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본고사'라는 명칭에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사는 각 대학이 출제한 문제로 치르는 시험이 입시전형의 핵심 자료가 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그것의 정상적인 혹은 일반적인 명칭은 '대학별고사'이며, 요즘 '논술고사'라고 불리는 것 또한 대학별고사의 일종이다. 그런데 현재 3불정책 자체가 금지하는 대상이나, 그것에 저항하는 집단이 원하는 것도 언제나 '본고사'라고 지칭된다.

본고사라는 표현이 의미있기 위해서는 그것의 짝이 되는 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있었던 대학입학 '예비고사'이다. 순수하게 자격시험이었던 이 시험은 말 그대로 대학별고사를 치르기 전의 '예비'였고, 대학별고사가 진짜 시험인 '본'고사였다. 이 점은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40대 중반 이상에게는 다시 듣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잘 알려진 일인데, 중요한 것은 그런 제도가 사라진 지 25년이 넘어도 여전히 그것이 지배적 명칭이라는 점이다.

사라진 제도의 명칭이 사반세기가 지나서도 우리의 표현을 점령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대학입학 시험이 영광의 절정감이든 패배의 뼈아픔이든 사라지지 않는 흔적을 개인들에게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 제도 아래서 성장한 사람들이 지금 40대 중반 이상 50대와 60대, 그러니까 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진 연령 세대에 포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에게 본고사란 대학별 시험이 주요 전형자료가 되는 것 이상의 문제, 그러니까 70년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논술 '따위'는 전혀 본고사로 지각되지 않는 것이다.

70년대 서울대 출신의 노스탤지어, 이제는 성찰해야

하지만 이런 사실은 본고사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그 쓰임새에 어떤 은밀한 가정이 내포되는지는 말해주지만, 왜 70년대로의 회귀가 공공연히 주장되는가를 밝혀주지는 않는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서울대가 내비치는 본고사에 대한 집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더해지는 다른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좁게는 서울대 교수, 넓게는 서울대 출신들이 가지는 공통의 특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대부분이 청년기에 대학입학 시험에서 승자였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험은 당연히 그들의 삶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경험이 그들의 이후 삶의 경로를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70년대 서울대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그 경험은 두 가지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하나는 그들의 연령대가 앞서 지적했듯이 현재 사회경제적 권력을 가진 집단일 뿐 아니라 그들이 그 연령대 중에서도 엘리뜨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한국사회의 유례없는 경제성장 국면을 타고 사회에 진출한 세대이며, 대학생이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시기에 명문대를 나와서 승승장구했던 집단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본고사는 좋았던 시절을 응축적으로 상징한다. 그들은 본고사에서 영광을 맛보았고, 그 본고사에서의 승리를 토대로 '달콤한 인생'을 얻었다. 그들 중 일부는 현재 서울대 교수가 되기도 했고 또 상당수는 자녀의 대학입시에 직면해 있는데, 7차교육과정으로 입시는 복잡해지기만 했고, 수능 9등급제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변별력이 없다. 서울대 교수들은 우수하다고는 하나 한껏 쉬워진 교과과정을 이수한 학생을 수업에서 만나게 되고, 자녀가 입시생이 된 서울대 출신들에게 현재의 입시는 어지럽고 비효율적이고 복잡하고 불안하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좋았던 시절에 집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동료 집단 속에서 그런 정서는 거의 저항 없이 통용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착은 상식으로 전환된다.

한 집단의 습속에 뿜어나오는 향수(鄕愁) 취미가 소신으로 발전하는 일은 납득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너무 힘있는 집단이라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걸맞은 책임감과 성찰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사회도 변했고, 아이들도 변했고, 대학도 변했다. 그 각각이 속한 환경도 바뀌었다. 이렇게 문제도 조건도 새로워졌다. 그런데 당면한 문제에 새롭게 도전하기보다는 지금은 사라진 조건 위에 서 있었던 어떤 제도에 대한 낡은 집착만이 여전히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오른다는 사실이 몹시 씁쓸하다.

2007.04.03 ⓒ 김종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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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편집증의 사회적 기원   

3불정책은 폐지되어야 하는가

김진경 | 시인, 아동문학가

요즈음 길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것 중의 하나가 논술과외 광고이다. 그중에는 유치원 아동을 대상으로 한 광고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걸 볼 때마다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의 삶일수록 놀이의 원리가 우세하게 작동하고 있고, 놀이와 현실, 놀이와 공부가 어우러져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어린이의 특성을 무시하고 성급하게 지적 요구를 강요하면 오히려 흥미를 잃게 하고, 창조적 잠재력을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아동책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게 그냥 한탄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아동책의 판매동향을 보면 대학입시 논술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여부가 판매량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다. 그래서 논술과 관련된 지식정보 기획물 쪽으로 시장이 이동하고 있고, 신문광고를 보면 창작물에도 흔히 대학논술에 이러저러하게 도움이 될 거라는 광고문구가 달려 있다.

이러한 현상은 작가로서 참 곤혹스럽다. 아이들의 특성과 현실, 다가올 미래를 고민해서 땀 흘려 쓴 작품들은 잘 안 나가는데 가볍게 쓴 작품들이 뜻밖에 잘 팔리는 경우가 많다.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 있어서 논술교육의 읽을거리로 적당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나마 동화 쪽은 논술 읽기자료로 어느정도 유용성이 인정되어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그림책 시장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입시 참고서 시장만 있고 본격적인 청소년 독서시장은 없는 중고등학교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동 독서문화가 내용적으로 황폐화되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입시논술이 지배하는 아동 청소년 독서시장

아동출판 시장이 어른출판 시장과 다른 특성은 대개 구매자와 독자가 같지 않다는 점이다. 책을 읽는 건 어린이인데 책을 실질적으로 선택하고 사는 것은 부모 등 어른인 경우가 많다. 아이들에게 책을 선택하게 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책을 고르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건 보통의 관심과 열의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출판 시장의 건강성은 어쩌면 구매자와 독자의 일치 정도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80년대 이후 성장해온 <창비> <사계절> <우리교육> <문학동네> 등 중견 전문출판사들의 건강한 아동출판은 독자와 구매자의 간격을 좁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아동출판의 성장은 따지고 보면 70, 80년대 우리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진취적 모습을 보였던 중산층이 기반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동출판 시장에서 독자와 구매자의 간격을 좁혔다는 것은 도구적 아동관, 즉 아동기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 수단,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입장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며 본질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회의 민주화 흐름이 모처럼 가능하게 했던 이러한 아동관과 아동출판의 변화 흐름이 꺾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아동문화의 손실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아동출판 시장의 변화 속도이다. 아무리 대학입시에 논술이 도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중고등학교도 아닌 아동출판 시장에서까지 어떻게 그렇게 빠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걸까? 여기에는 아무래도 대학입시 제도의 변화보다 더 깊고 넓은 원인이 있는 듯싶다.

사교육 광풍을 부추기는 기득권의 이해관계

앞서 밝힌 대로 아동출판 시장의 지속적 확대는 경제성장에 따라 두터워지는 중산층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양극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중산층이 엷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 불안감이 중산층을 부동산과 사교육 등 방어적 투자로 내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책수단으로도 부동산 투기와 사교육 열기가 잘 꺾이지 않는 것이다. 아동출판 시장의 변화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대학논술은 여기에 기름을 부어 그 속도를 빠르게 한 것뿐이다.

근래의 학교교육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 '권력실조증'에 빠진 기득권층이 중산층의 추락에 대한 불안감을 부채질하여 편집증(偏執症) 상태로 몰고가는 듯한 느낌이다. 평준화와 3不정책(기여입학제·고교등급제·본고사 금지)을 둘러싼 논란이 그렇다. 현재의 특수목적고·자립형사립고 학생수가 전체 고교생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과거 일류고가 전체 학생수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1.5배나 넘어섰다. 그런데도 특정 언론과 사회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특목고·자사고의 확대를 부르짖는다.

뿐만 아니라 강남 고등학생의 이른바 일류대 진학률이 전남의 9배에 이르고 다른 서울내 학군의 4~5배에 이른다. 특목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