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구체적인 통일모델을 고민할 때  
6·15 일곱돌 평양축전을 다녀와서

손장래 | 민화협 상임고문, 경남대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지난달 평양에서 있었던 6·15공동선언 7주년 민족단합대회에 참가했다. 6·15공동선언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우리 세대의 책무를 통감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이 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한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특히 대회를 훌륭하게 치르도록 많은 환영행사를 준비하고 실시했던 북측의 모든 성의에, 그때 그 장소에서의 감동과 함께 만강의 고마움을 표한다. 한편 이번 행사가 기대하고 예정됐던 대로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여러 사정들을 아쉽게 느끼면서 몇가지를 생각해볼까 한다.

6·15 통일방안의 핵심

우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 규약>과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북남)해외 공동행사 준비위원회 결성선언문>을 보면, 이 조직은 "6·15공동선언을 실천하여 민족의 화해와 단합, 통일을 이룩하려는 남, 북, 해외의 각 정당, 단체, 인사들을 폭넓게 망라하기 위한 상설적인 통일운동 연대조직이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그리고 6·15공동선언 제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6·15선언 7돌이 됐고 6·15공동선언실천 민족공동위원회가 발족한 지 2년이 되었으나 6·15선언 제2항에 언급된 남측의 '국가연합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내용이 무엇이며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나 기획·계획 등이 아직 남북 당국간에 공식으로 진지하게 논의되고 진척된 바가 없다. 통일을 위한 남북 당국의 의지와 구체적 실천능력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일부의, 아니 일부라기보다 오히려 다수의 지배적인 시각이, 아직은 통일문제를 논의할 단계가 아니라 교류를 확대하고 먼저 평화정착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적 물적 교류와 협력은 시간을 두고 활성화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평화정착'의 측면으로 볼 때는 지난 7년 동안 충분한 정도 이상으로 정착됐다고 보며, 정확히 말하면 1953년 7월 휴전협정 이후, 기간중 비록 군사적 충돌사건은 있었지만 전면전쟁으로까지 확대는 되지 않았고 그런대로 평화는 50여년 유지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개인이나 회사, 사회단체 특히 국가는 당연히 중장기적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시간계획 등을 갖춰야 한다. 중국은 홍콩과 마카오를 각각 환수하면서 하나의 국가와 상이한 두 체제(공산주의체제와 자유시장경제체제)의 병립, 50년 유지를 천명했으며, 쌍방의 통행왕래는 사증(비자) 발급의 절차에 따르게 했다. 물론 그 시간계획과 목표달성은 내외적 상황 변화에 따라 앞당겨지거나 연기될 수는 있겠다.

민족단합대회 연설문과 통일방안

북측의 이번 행사 연설문에서, 평양의 1948년 4월 30일 남북지도자 대표회의 등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이정표적인 주요사건들이 적절히 열거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중 1991년 12월 13일의 남북기본합의서 합의는 매우 중요한 사항임에도 이에 대한 표현이 구체적으로는 없었는데, 그 이유와 여러 사정을 추측할 수 있었지만 의아하게 생각됐다. 그리고 이번 행사 연설문에서, 북과 해외측 대표로부터는 6·15선언 제1항에 대한 적절한 강조는 좋았으나 제2항의 통일방안과 그 구체적 추진방안은 언급되지 않았다. 연설시간의 제약 때문에 빠졌을 수도 있지만 후일을 위한 행사의 기록보존 면에서라도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행사연설에서 남측의 백낙청 상임대표가 강조한 아래 구절은 당연 적절하고 시의적으로 옳은 지적이었다고 본다. 

"갈라진 조국의 남북연합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거치면서 평화적이고 자주적일뿐더러 점진적·단계적으로 다시 합쳐나가기 위해서는 민간의 대대적이고 창의적인 참여가 필수적… 우리식 통일의 진행과정에 대해 민족공동위원회다운 독자적이고 성숙한 경륜을 가져야 하며… 어떤 분단국도 실현하지 못한 새로운 통일과정을 완성하여… 평화롭고 품격높은 새 나라를 건설…합시다.”

6·15공동선언 민족단합대회는 상호이해와 화합단결의 축제이며, 동시에 6·15선언에서 천명된 국가연합,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에 입각한 통일의 단계적 추진에 대한 합의와 강조에서 한단계 더 나아가 통일방안의 구체적 논의, 계획 수립, 시간계획, 국내외 인사와 기관당국에 대한 홍보와 설득, 합의 도출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앞장서는 장이 되어야 한다.

시민사회와 민간인들의 기여와 참여가 절실하다

저명한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해서 "4대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는 한국은 이를테면 네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에 둘러싸여 있는 개미와 같다. 네 마리의 코끼리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각기 뛰어다닐 때, 개미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당황하고 혼미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국제관계에 예리하고 정확한 분석과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통독시의 서독 대통령 바이체커도 수년 전 한국을 찾았을 때 "남북의 분단상태는 오래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그 희생과 비용이 커질 것"이라고 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바꾸지 못하는 한, 인간의 역사는 규칙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고 했다. 지구자원의 고갈, 인구의 팽창, 식량의 부족, 환경의 오염, 지구온난화, 인간이 사랑과 함께 갖는 부수적인 오해, 불신, 파괴, 잔인성과 전쟁 등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자연의 법칙을 감안할 때, 우리 민족의 지정학적 미래는 항상 평화롭고 행복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국가이익 추구를 위해 무자비하게 무력이 행사되고, 분할과 통치의 원칙이 난무하는 냉혹한 국제환경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현재의 분단상태로 인한 엄청난 낭비와 희생의 비극을 계속할 수 없다. 후세는 우리가 100년 전 일제에 의한 망국의 치욕을 겪은 우리의 조상시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듯이, 분단상태를 아직도 해결치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세대를 관대하고 이해하는 고운 눈으로 보지는 않을 것이다.

정부 당국은 시대상황에 따라 대내외 정책과 그 실천행태가 달라진다. 그러나 당국의 정치행태와는 다른 인식을 지닌 학생·지식인·노동자·농민·기업 등 각계각층의 시민 및 단체들의 행동에 의해 3·1운동, 4·19의거, 6·10항쟁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었고, 이것이 당국이나 정책을 크게 바꾸도록 만들었다. 통일을 지향하는 데 있어서도 시민단체는 당국을 뒷받침하고 보완하며 또는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업인 정주영 전 현대명예회장의 역사적 대북 선구자 역할과 당국관계 등을 함께 고찰해보며, 시민운동과 민간의 기여를 극대화해야 한다.

2007.7.2 ⓒ 손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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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평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6·15 통일대축전의 막전막후

서동만 | 상지대 교수
 
이번 6·15 7주년 평양행사는 2000년 정상회담 이래 남북관계가 획기적 진전을 이루었으면서도 여전히 많은 숙제를 안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동안의 남북 민간행사에서는 서로 이견이 있거나 문제가 생겨도 대체로 그날 안에 타협을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서는 문제가 생긴 지 이틀이나 지나야 겨우 수습이 되어 대회를 마친 것이다. 방문 이틀째인 6월 15일 오전 10시경 민족단합대회 개시 직전에 남측 대표단이 착석한 가운데 북측이 불시에 한나라당 박계동 의원의 주석단 착석이 불가하다고 주석단의 입장을 제지하고 나섰고, 이로부터 이틀간이나 공전한 끝에 마지막 날인 17일 가까스로 대회와 폐막식이 성사된 것이다.

파행의 시작과 남북의 갈등
         
6월 15일 남측 대표단 집행부와 북측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3백명의 대표단과 기자단은 하루 내내 행사장에 갇혀 지냈다. 북측 체제의 속성상 자유이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북측이 기자단에 협조하지 않는 한 보도도 할 수 없는 처지를 두고 일부 기자들은 '억류'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평양에서 열리는 모든 형태의 만남은 철저하게 통제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터라 일종의 억류된 처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공전 기간의 상황은 오히려 대표단이 북측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벌인 '농성'에 가까운 것이었다고도 여겨진다. 그리고 지루한 기다림이 계속되었지만 참가자 어느 누구에게서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다.    

남측위원회 집행부는 한나라당 의원의 주석단 배제가 사상·이념·제도의 차이를 넘어선 민족대단결을 강조하는 6·15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며, 당초 예정대로 한나라당 대표가 참가하지 않는 한 대회에 참가할 수 없다고 버텼다. 무엇보다도 6·15 남측공동위원회는 정당, 사회단체, 종교계의 결합체인만큼 정당의 하나라도 빠진다는 것은 남측위원회의 성격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한나라당이 빠진 상태에서 열린우리당 의원 또한 참여하기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북측의 자세 변화와 남측의 내부 논쟁

북측이 타협안으로 정당이 빠진 남, 북, 해외 위원장 4명과 사회자, 연설자 등 출연자를 합쳐 11명만이 주석단에 참석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집행부는 이를 거부하고 아예 주석단을 없애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남측위원회가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주석단 폐지는 한나라당이 빠지는 대신 조선노동당도 빠지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어떻든 북측은 기세좋게 한나라당을 배제하려 나선 당초 모습과는 반대로 이후 줄곧 남측 집행부를 부여잡고 설득해보려는 낮은 자세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건대 북측은 트집은 잡되 판을 깨려는 의도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이날 오후 행사장 로비에 참석자들을 모아놓고 백낙청 상임대표가 북측이 한나라당을 배제하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한 대회는 무산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밝히자 남측의 상당수 참석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공동대표자회의를 소집했지만 이 자리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일부 대표들 가운데서 상임대표를 불신하는 발언도 나왔고, 무엇보다도 남측 대표단 내부에서 컨센서스(합의)를 유지하는 일도 심각한 과제가 되었다. 이렇게 15일은 대회가 성사될지 깨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상태에서 대표단은 숙소로 돌아왔다. 심야까지 북측과 남측 실무대표들과의 협의가 지속됐다.

북측의 비공식적 제의

다음날 협의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참관행사를 진행하자는 북측의 제의에 따라 대표단들은 예정대로 만